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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독 Oct 17. 2023

정답은 90% 무의식에 있습니다

L열 13번의 관찰자

   이번에는 잎새가 눈을 감고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영화관입니다. 스크린에는 한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고, 객석에는 누군가 앉아있죠. 비밀이 있는데 스크린 뒤에서는 실시간으로 영화를 찍어 내고 있어요. 연출도 나 자신이 하고 있고, 작가도, 촬영도, 심지어 출연까지 스스로 하고 있죠. 제작하는 그들은 어떤 모습인가요? 서로의 관계는 어떤가요?

   당신은 계속 그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어때요? 재밌나요? 어떤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길래요? 혹시 다른 등장인물도 있나요?

   마지막으로 객석을 돌아보죠. 그곳에는 어떤 존재들이 어떤 표정으로 앉아있는지. 그들은 지금 어떤 감정일까요?”     


   첫 물음표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연출이 자꾸 성질부려요. 스텝들이 답답한가 봐요. 서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많은데 아무 말 없이 참아가면서 제작하고 있어요. 다들 표정도 지쳐 보이고, 고개를 떨군 주인공은 구름 밟고 위로 올라가기만 해요. 다른 등장인물 없이 혼자인데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네요. 무표정이거든요. 확실한 건 재미가 없어 보여요.

   객석이요? 객석에는 가족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수많은 사람이 앉아있어요. 그런데 자꾸 들락날락해요. 신경도 쓰이고 이해가 안 가네요. 분명 영화는 재미없어 보이는데, 사람들은 왜 웃고 떠드는 건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방금 한 건 ‘최면’ 비슷한 거다. 실제 최면에 걸린 상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떠올리는 건 살아오면서 축적된 무의식에서 흐른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의식의 영역을 빙산의 일각이라고 표현했는데, 이처럼 심리학에서는 주로 의식을 약 10%, 무의식은 약 90%라고 말한다. 그 말인즉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거다.

   우리가 일상에서 정보를 습득하고 나아짐을 위해 움직이는 건 대부분 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정작 마음을 이루는 건 90%가 무의식인데 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바꾼다 한들 당연히 나 자체가 바뀔 리 없었다. 식단관리 하겠다더니 습관처럼 음료에 휘핑크림부터 얹는 내 친구처럼 말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면서 연일 소원을 빌다가도, 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추상만을 좇는다.

   그러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묻어남에 숨은 90% 무의식 영역을 최대한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영화 속 모든 장면을 내다본 유일한 등장인물. 내가 아는 무수한 조각 중에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인 걸까. 이 과정을 나는 ‘자기 객관화’로 새로 지칭할 것이고,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은 아니지만, 쉬운 이해를 위해 의식에게 이성, 무의식에는 감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감정은 그동안 겪어온 환경과 경험에서 만들어진 나로부터 저절로 묻어 나온다. 주관적이지만 하나의 존재에게 찾아오는 후천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원해서 만들어진 것도, 일부러 찾아오는 건 더더욱 아니니까 어떤 감정일지라도 스미는 감정 자체에 대해서는 자책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누가 뭐래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니까.

   대신 익숙하지 않은 나라서,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인정해 주는 연습이 필요하다. 근본이 실종된 텅 빈 껍데기였대도 안정을 깨는 행위에 경계를 품는 건 본능이고, 변화의 본질은 바꾸려는 단순한 의지를 넘어 모습 그대로 인정하려는 존중이었다. 그렇게 지니는 감정들에 대해서 여유가 생겨난다면 이성은 추측을 통해 감정, 즉 나를 위한 최선을 내려줄 것이다. 감정이 무시된 이성은 없으니까. 너무 이성적이라며 고민하고 매달렸던 행위들은 한낱 불안함일 뿐 이성적인 게 아니었다. 그게 이성이 감정의 관찰자로서 책임지고 하는 역할이자 자아가 꾸려진 인간만 누릴 수 있는 최고 특혜다. 잠깐 빌렸을지도 모르는 몸뚱어리. 한 발짝 떨어져서 나 자신 바라보기. 그런 면에서 자의식이 분리된 명상이나 산책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최상의 취미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돌아봤다. 위 최면 속 나는 어떤 무의식을 가진 걸까. 사실 영화관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는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는 내 인생이다. 어떤 영화가 상영되고 있나 봤더니 어디론가 혼자서 묵묵히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주인공이 보인다. 단지 올라가는 게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모든 표정과 행동에는 행복감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고, 삶이라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눈앞의 그림을 실제로 구상해 내는 연출을 포함해 영화를 제작하는 모든 이가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을 감정 억눌러가며 꾸역꾸역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객석의 존재들은 무의식에 우리가 신경 쓰고 있는 관찰자들이다. 측근을 포함한 불특정 다수에게 나라는 영화를 잘 보이고 싶고, 실시간으로 꿈틀대는 그들의 반응을 살핀다. 그들은 왜 들락날락할까. 소리소문없이 증폭되는 불안에 밀려 눈치만 살핀다.

   마지막에는 제일 중요한 게 빠져있었다. 제작자이자 주인공인 나 자신도 찾아보지 않는 영화라면 누가 그 영화를 즐길까. 정작 스스로는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다. 누가 앉아있든, 앉아있지 않든, 자기 영화인데 적어도 객석 맨 앞자리에는 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 물론 맨 앞자리는 목 아프니까 다른 자리여도 좋다.     


   3년이 지나 다시 바라본 영화에는 선뜻 도움을 주었던 잎새처럼 힌트가 필요한 그들에게 물음표 남기는 내가 보인다.

   “당신의 무의식에는 어떤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나요?”

   어떤 친구는 객석을 상상했을 때 덥수룩한 긴 머리의 유대인 아저씨가 앉아있기도 했다. 이렇게 모두가 다른 의미를 품고, 다른 영화를 만들어 내면서, 객석에는 각자의 다양한 관찰자를 앉힌다. 겉모습만으로 완벽히 이해한대도 고작 10%. 아무리 영민 형과 가깝게 지내도 번아웃을 눈치채지 못했듯, 소원의 상실이 갑작스러웠듯, 관심과 이해가 부재한 판단은 잘못된 의미를 끌어낼 뿐이니, 감히 타인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사소한 질문에 빗댄 추측뿐이었다.

   우리는 관찰되는 전자 덩어리로서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존재하는 영화관은 하나의 조건만 성립된다면, 평점 만 점의 천만 관객 부럽지 않은 특별한 공간이 될 수 있다. 혼자서도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설레는, 다른 관찰자의 영향을 받기 전에 스스로 관찰자가 되어 즐길 수 있는 나만의 놀이터 같은 공간 말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장면이 와도 떠나지 않을 존재. 나의 살아감이 암전을 맞이하기까지 곁을 지켜줄 영원한 관찰자, 이성이 존재하니까. 지금부터라도 나는 나의 1번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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