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순간을 기억하려면

by moon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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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웃어요?”
“응? 너희들이 노래하고 노는 것을 보면 엄마, 아빠는 재밌고 즐거워.”
“그래요? 나는 내가 재밌어야 재밌는데.”


저녁을 먹고 설거지하는 아내 뒤에 둘째 아이가 앉았다.

킨터 조이 장난감으로 인어공주를 갖게 된 녀석은 완전 흥분상태다.

옆에 있던 돼지 장난감을 가져와 에릭 왕자라 칭하며 상황극을 연출한다.

급기야 배가 침몰하고 인어공주가 에릭 왕자를 구하는 장면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소음이지 하던 아내가 잠시 물소리를 줄이고 귀 기울인다.

처음 듣는 멜로디다. 숨을 죽이니 목소리의 강약이 곁들인 한 음이다.

녀석도 처음 노래한 모양이다. 아마 결코 재생하지 못할 멜로디겠지.


아내가 웃는다.

나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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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좋은 아버지, 그러나 전 그게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전 아이들에게서 이미 아주 많은 즐거움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웃음, 그 찬란한 웃음, 어떤 순간, 어떤 눈빛, 어떤 일상의 대화, 아픔, 아비이기 때문에 느끼는 그 아이가 인식한 아픔보다 어쩌면 더 큰 아픔을 저는 기억합니다.
아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빛나는 순간을 아주 많이 기억하는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 좋은 아버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들에 대해 아주 많은 아름다운 심상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간혹 그 아이들에게 그 아름다운 장면을 이야기해줄 수 있으면, 그리하여 스스로 그 아름다운 순간을 거쳐 왔음을 잊지 않게 해줄 수 있다면 아주 멋진 아버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2013, 휴머니스타) 중 <생전 처음 쓰는 아버님 전 상서>(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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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에서 아빠들의 육아를 돕고자 2011년부터 <100인의 아빠단>을 운영하고 있다.
우연히 멘토로 활동하게 되어 멘티 아빠들을 위해 <일상 미션> 하나를 나눈 적이 있다.


다름 아닌 <아이와 함께 풀꽃 보기>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집 근처 화단을 찾아 풀꽃을 보고 나눈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

언젠가 교외로 꽃구경을 다녀오는 길에 아파트 화단에도 풀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고 멈추어 꽃을 색깔별로 구분하고 이름을 붙인다. 오가는 벌과 나비에게 ‘이리 오라.’ 속삭이다 외치고 심지어 겁박(?)한다. 그때 녀석들이 보인 손가락의 방향과 입술의 떨림, 가끔 침을 튀기기도 하지만 진지한 표정에 오른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그래서 멘티 아빠들과 함께 할 미션으로 제시했다.


일주일 후.

후기를 보니 보통이 아닌 아빠들이 많다.

매일 차로 다니던 등 하원 길을 오롯이 딸과 둘이서 걸으며 재잘거림을 들을 수 있었단다. 꽃보다 더 예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추억 상자에 담기도 하고, 아빠의 설명보단 지나는 벌과 나비 그리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에 반짝이던 눈빛도 보았다고 한다.

가끔 너무도 바쁜 일상에 집 앞 화단에 나가기도 어려운 아빠들도 있어 안타까웠지만......


맞다. 일분일초가 아깝고 때론 급박하기도 한 출근길.

시각을 확인하며 버스를 놓칠까 걱정하던 나에게 주위를 둘러보는 건 사치였다.

그리곤 가족을 위해 거창한 한 방을 기대하며 먼 길을 내달렸다.

집 앞에서도 활짝 피는 아이들의 미소를 보려고 말이다.

나도 아이들의 웃음, 눈빛, 일상의 대화를,

아이들에 대해 아주 많은 아름다운 심상을 기억하는 아빠가 되고 싶다.

에고 어제도 잔소리하며 아이들의 눈물샘을 건드렸는뎅.

이런 기억은 이제 가끔, 아주 가끔씩만 남기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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