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nlight Apr 07. 2016

아빠와 아이의 일체화一體化 이야기

어제 늦게 잔 터라 첫째 쑥쑥이의 기상도 늦어질 것이라 생각해, 7시 30분에 방으로 들어가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보통 7시 50분에야 겨우 눈을 뜨고 세수한 후 8시 50분을 경계로 겨우 등교하는 녀석에게

오늘은 좀 더 워밍업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였다.     


좋아하는 노래까지 들려주었지만, 평소와 달리 깨질 않는다.

눈으로 찡긋 아빠를 보고도 다시 눕는다.

그렇게 20분을 기다렸건만 일어나질 않는다.     


8시가 넘자 둘째 쭉쭉이의 왕성한 활동 덕에 마지못해 깨서는 차근차근 꼼꼼하게 아빠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인다.

결국, 나는 폭발했고, 급기야 감정싸움으로 이어졌다. 다행히 우리는 오랜 학습으로 멈추는 선을 알았고 등교 전엔 극적 화해를 이루어냈다.     


-

둘째 쭉쭉이가 낮잠을 자던 시각.

모처럼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강신장, 황인원 님이 지은 <감성의 끝에 서라>는 책으로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창조의 방법이 보인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저자는 이 시를 보며 “대체 시인들은 어떻게 대추 속에 있지도 않은 태풍을 볼 수 있는 거죠” 하는 물음으로 여러 시인을 찾았고 거기서 일체화(一體化)라는 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묻는다.    

“시인들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곧 ‘그것’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끝까지 가봄으로써

벽이 되고, 하늘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고, 대추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대추가 되어본 적이 있으신 분 손 들어보시겠습니까?’“ <감성의 끝에 서라, 41쪽>

                                           
   

직장인과 경영자를 위한 책이지만 육아휴직을 한 나에겐 “진정 아이가 되어본 적이 있나요?” 하는 물음으로 울렸다.     


+

사실 아빠와 아이 사이의 일체화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다만, 그 일체화가 아빠가 아이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시선과 습관, 규칙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이었다.    


곰곰. 곰곰. 또 곰곰. 생각하게 된다.

내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첫째가 하교할 시간이 되어 현관문을 열고 학교 후문을 바라보니 저기 연분홍 카디건을 입은 아이가 있다. 손을 흔드니, 메아리처럼 다시 손을 보낸다.     


그러고 잠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녀석얼굴이 ‘나 무슨 일 있어요!’ 하고 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무슨 일이 있지 왜 없어. 숨을 쉬는 것도 일이고, 아무 일도 죽는 것도 일이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일이고. 뭐든 일인데.”

(살짝 당황한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얼굴을 보니 슬픈 일이 있어 보여서, 무슨 일인가 걱정되어 물어본 거야.”

(긴장을 풀면서 조금 울먹이는 목소리로)

“A가 놀리는 거야. ‘도라지 먹고 돌았냐?’ 하면서”        


보통 같아선 <학교 다녀와서 아빠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니?> 하며 아빠 감정을 앞세우거나 <친구가 왜 그랬어? 이유가 뭐야? 그래서 넌 어떻게 했어?> 하며 원인을 따져 아빠가 원하는 방법으로 사건(?)의 해결과 향후 대책까지 강요했을 테지만    


오늘은 쑥쑥이의 마음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차근차근 흘러나오는 전후 사정과 속상한 감정들.     


이제야 조금씩 아빠가 너의 마음으로 들어가는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5일간의 독박육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