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엔 눈꽃이 포슬포슬

첫 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by 명연재

아침 6시, 알람이 울린다.

대용량 봉지에서 식빵 두 조각을 꺼내 토스터에 넣는다. "탁" 소리가 나면 식빵을 꺼내고, 그 위에 녹는 치즈를 한 장씩 얹는다. 1분쯤 지나면 바삭하고 짭짤하며 고소한 치즈 토스트가 완성된다. 여기에 우유 한 잔을 곁들이면 아침 식사 끝.


예전엔 잠들기 전, 아내에게 "내일 아침밥은 뭐야?"라고 묻곤 했다. 요즘은 내가 아침을 차린다.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해서다. 올해부터 아내는 일을 늘였다. 전엔 경력 유지 차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월급은 집에 보태거나, 옷을 사거나, 자기 용돈으로 썼다. 그 돈에 대해 나는 딱히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아내 월급이 우리 집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다.

내 수입은 연구조교로 받는 월 100만 원이 전부다.


7시쯤 학교에 도착한다.

이른 시간이라 30분 내외면 닿는다. 돈을 생각하면 지하철이 낫지만, 시간과 체력, 그리고 간간히 차가 필요한 일들을 생각해서 차로 학교에 다녔다. 다행히 박사과정 학생에겐 월 정기주차권이 저렴하게 제공됐다.


주차장에서 올라와 중앙광장 지하의 커피숍에서 1,200짜리 아메리카노를 산다. '하루 한잔의 커피'는 나를 위한 유일한 사치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불을 켜고 책상에 앉는다.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맡으며 영어 성경 한 구절을 읽고, 잠시 명상한다. 이어 중국어 공부까지 마치면 어느덧 8시다.


세 과목을 신청했고, 수업 시간표에 맞춰 예습과 복습을 했다. 대부분 수업은 영어로 진행됐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하며 익힌 실전 영어가 예상외로 도움이 됐다. 당시 회사엔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영어를 접했을 때는 정철 카세트테이프의 도움을 받았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 중 외국인을 처음 만났다. "Good morning, How are you? And you?", 그날 사용한 전부다. MP3가 보급되던 시절, 지하철 출퇴근길에 오성식 생활영어를 들었다. 영어 콤플렉스도 있었고, 영어 회의가 잡히면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살아남기 위해 말하다 보니, 영어로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살려고 하면, 다 살아지는 모양이다.'


연구조교 일도 했다.

강의 10분 전 강의실 불을 켜고, 빔프로젝트를 켜고, 스크린을 내리고, 마이크를 점검하고, 칠판을 닦고, 색상별 마카도 준비한다. 시험 기간에는 감독도 하고 채점도 도왔다. 수업 보조로 강의실을 들락날락하다 보면, 학생들이 갸우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교수님인가? 아닌가?' 그 밖에도 논문 검색, 자료 복사, 강의 관련 공지, 세미나 준비, 각종 안내, 이외 자잘한 심부름도 내 몫이었다.

100만 원, 그저 받는 돈이 아니었다.


수업과 연구조교 외의 시간엔 기계학습(ML, Machine Learning) 관련 논문을 찾아 읽었다. 가끔 선후배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자극도 받았고 은근 걱정도 되었다. '과연 내가 저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AI 모델링, 통계 분석, 논문 작성을 위한 소프트웨어들도 다시 익혔다. 신입 대학원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과 세미나도 부지런히 참석했다.


"지도교수를 믿어라."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졸업.. 그 너머를 보아라."


교수의 꿈을 이룬 선배들의 경험담이 마음을 흔들었다. 어쩐 일인지, 이 무렵 나는 자주 눈물을 흘렸다. 손대면 바로 감정이 북받치고 눈물이 터지는 울보가 되버렸다. 자신의 공부가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이타성(利他性)'을 강조하던 강연도 기억에 남는다.


논문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뇌 속을 젓가락으로 휘젓는 듯한 통증으로 머리가 띵했다. 시신경과 관련 있는지 관자놀이와 후두부도 욱신거렸다. 파워포인트 자료만 보다가 깨알 같은 글자를 억지로 읽다 보니 탈이 난 것이다. 세로로 전환 가능한 피벗 모니터를 장만했고, 안경도 새로 맞췄다.


'과연 따라갈 수나 있을까?'

그런 의구심, 부담과 함께 두 달이 흘렀다. 가끔은 군대에 재입대하거나 학력고사를 다시 치는 꿈도 꿨다. 특히 미래 지도교의 수업은 성적이 안 좋을까 마음을 졸였다. 시험 날, 떨리는 손으로 답안을 써 내려갔다. 나중에 교수님께서 "손글씨가 뭐 이 따위야"라며 핀잔을 주셨다.


'이제는 좀 해볼 만한데...'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첫 학기 중간고사가 끝났다. 몸과 머리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처음엔 시큰둥했지만 막상 해보니 괜찮은 일도 있고, 기대했던 일인데 해보니 실망스러운 것도 있다. 나의 박사과정은 아직 초기라 판단을 하기엔 이르다. 사실 그런걸 신경 쓸 겨를도 없다.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은 학교라는 공간.

콘서트의 전반부가 지나고 공연 중간에 객원 가수가 등장한다. 관객들에게 조심스러운 인사를 건네고, 막 첫곡을 시작하려는 게스트 가수. 이 시기의 나의 모습이었다.


수업 중 교수와 의견이 부딪히거나 본의 아니게 얼굴 붉힐 일도 있었다. IT 분야에서 20년 가까이 일한 내 이력이 교수들에게는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나는 이 말을 몸으로 배우는 중이다. 덜 자라서일 수도 있고, 이미 너무 자란 탓일지도 모르겠다.


주말 저녁이면 아내와 개천을 따라 걷는다. 학교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전에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저 쉬기 바빴던 내가, 이제는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애들 학원은 그대로 유지해도 괜찮을까?”

“응, 아직은 그냥 가 보자,”


벚꽃이 피고,

덜 자란 수탉의 벼슬 같은 꽃몽우리가 터지고,

이팝나무 위로는 하얀 눈꽃이 포슬포슬 내릴 때까지,

내 삶은 흘러갔다,

은빛 물결 반짝이며 데굴데굴 흐르는 산골짜기의 시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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