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노랑, 하양, 초록 구슬이 노래방 벽을 정신없이 뛰어 달렸다. 회전하는 디스코볼 조명 아래, 이곳 노래방 여포(?)들은 끝을 모르는 '나는 가수다' 대결을 이어가고 있었다. 술기운이 온몸에 퍼지며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기분만큼은 묘하게 좋았다. 몇 달간 마음을 졸였던 K사의 차세대 IT 프로젝트의 중간보고가 무사히 끝났기 때문이었다.
보고 후 이어진 뒤풀이. 테이블 위에는 술병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이곳저곳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제각각 소모임에 빠져 있었다. 자리를 정리해야 할 분위기였다. 술과 담배 냄새, 사람들의 땀내가 뒤섞인 노래방안, 머리가 지끈거렸다. '절대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나는 테이블 아래 신발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노래가 멈추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줄곧 술잔만기울이며 조용히 공연(?)을 지켜보던 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 K사 IT 팀의 이 팀장이었다. 잠시 전주가 흘렀다. 그의 선곡은 들국화의 <제발, 1986>.
제발 그만해 둬 / 나는 너의 인형은 아니잖니 / 너도 알잖니...
잘 부른 노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사 한마디 한 미디가 송곳처럼 가슴에 박혔다.
'아..., 이 분, 뭔가 사연이 있구나.'
여름 계절학기 강의를 마치고 2학기 개강 전까지 논문에 집중하리라 다짐했지만, 현실은 허락하지 않았다.
8월 끝자락, 나는 결국 아버지를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시켰다. 쇠창살문을 지나 육중한 철제 보안문이 쾅 닫히는 순간, 아버지는 바깥세상과 단절되었다. 병원 철문이 닫히기 직전, 좁은 문 틈으로 아버지는 체념한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절규가 한참 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뒤돌아 서니 눈물이 차올랐다.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하겠냐며, 경험해보지 않았으면 말을 꺼내지 말라며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부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야 하는 당사자인 자식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이 보다 더 못할 짓이 없었다.
그때, 10년도 더 지난 기억이 불현듯 스쳤다.
노래방에서 들었던 그 노래 <제발>.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제발"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왜 지금.“
그날 아침, 119 구급차를 불렀다. 아우성치며 아버지는 탑승을 거부하셨다. 한동안 실랑이 끝에 구급차는 병원에 도착했고, 의료진 손길이 닿고서야 아버지는 다행히 진정됐다. 병원의 여러 과를 거치며 검사와 진료를 거듭한 끝에 입원 허가가 떨어졌다. 병원에 근무하는 동생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동생을 보면서도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창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우리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생에서 이런 부모 슬하에 남매로 만났을까?
차라리 내가 더 든든한 오빠였더라면....
사십 중반, 직장도 없는 학생 신분인 초라한 내 모습, 너무 미안했다.
얼마 뒤, 아버지는 치매 진단을 받았다. ’지난 3년 학교에 매달려 있는 사이, 아버지는 치매를 얻었어.‘ 잠지리에 들 때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평소 부모님께 각별한 아들은 아니었지만, 막상 아버지가 치매라는 진단을 받으니, 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왜 이리도 초라한지, 슬프기도 하면서 참으로 허망했다.
아버지의 치매는 한동안 우리 가족의 일상을 무너뜨렸다. 치매로 인한 망상은 잦은 일탈과 부부싸움으로 이어졌고, 어머니는 내내 지쳐 울었다. 부모님 댁에 방문해서 상황을 지켜보아도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희망만은 버릴 수 없었다.
학교생활에서도 내 삶은 곪아만 갔다. 초안 단계에 멈춘 분석 논문은 1년이 훌쩍 넘도록 진전이 없었다. 지도교수는 가끔 메일만 보낼 뿐, 한 달에 한번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지도교수님도 분명 사정이 있으셨겠지만, 도대체 학생을 지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회사에서도 팀장이 팀원들을 이렇게 방치하지는 않는데… 학교라는 세계의 생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지도교수도 자신만의 세계에 사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내 주변에 왜 이런 사람들뿐인지. 참고 참고 이해하고 또 이해하려 했지만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삶은 엎친데 덮친 격인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력감이 분노로 변해갔다. 된다며,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며, 나 자신을 속이며 다 잡는 것도 위선으로 느껴졌다. 나는 지쳐만 갔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가을의 문턱, 나는 아버지의 치매와 지도교수의 외면이 겹친 삶의 무게에 방황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에 작은 위로의 손길이라도 건네었더라면, 나는 아마 그 자리에 울며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러다 맞이한 추석 연휴, 처제의 초청으로 충남 공주에서 열린 백제문화축제에 들렀다. 행사장은 전날 비로 진흙투성이었고, 분주한 행사 요원들에도 불구하고 어수선했다. 어디선가 하얀 연기와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겼다. 식당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돼지껍데기를 주문했으나, 기대했던 바삭한 그것은 나오지 않았다. 초록색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것은 껍데기 찜에 가까웠다. 나는 젓가락으로 몇 번 누르는 시늉만 하다 자리를 떴다.
강변 코스모스 군락을 지나 공주산성 성곽에 오르자, 잔잔한 금강 위로 줄지어 떠 있는 수십 척의 돛단배가 보였다. 간간히 강바람이 불어와 이마와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처제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부, 밤에 보면 정말 장관이에요."
나는 한참 동안 흐르는 듯 서 있는 강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금강변 축제장으로 돌아가는 길, 귀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악이 들려왔다. '잉카안데스음악'이라고 적힌 플랭카드 아래, 마야 복장을 한 두 명의 음악가가 '황야의 무법자'를 전통 악기로 연주하고 있었다.
뭐지? 저 외국 뮤지션들은?
이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조합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머나먼 한국 땅에서 마야 복장을 하고 황야의 무법자를 연주하는 잉카 문명의 후손.
뒤죽박죽 웃픈 모습이 마치 지금 내 인생과 흡사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