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캄보디아를 그리워하며

by 지천

창 밖에는 담록으로 물든 나무와 풀이 내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피었다 지고 화단을 뒤덮은 꽃잔디는 화려한 몸짓을 거두고 이제 푸른 생명으로 다시 어어가고 있다. 그 사이 불두화가 하얀 꽃을 탐스럽게 피었고 집 아래 밭에서는 이팝나무가 쌀알 같은 흰 꽃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잔디에 난 풀을 뽑는다. 마당 한 켠에 마련된 텃밭에는 상추를 심고 쏙갓과 치커리를 먼저 심었다. 그들이 한참 자랄 무렵 나는 고추와 오이, 가지를 심고 또 토마토 모종을 사서 심었다. 겨울을 이겨낸 부추와 파는 식탁에 오른지 오래 되었고 또 씨앗으로 심은 루꼴라도 이제 먹을 만큼 자랐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동네 사람들과 풍물 연습을 하고 또 마을회관에서 하는 요가나 동사무소 2층에서 하는 몸살리기 운동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가끔은 옛 인연들을 만나 짧은 여행을 하기도 하고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강 길을 달리기도 했다. 만남의 끝자락에 이어진 술자리에서는 캄보디아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불쑥 나와 부러움이 담긴 눈길을 받고 있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농담처럼 들으며 생활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신문이나 방송에 캄보디아라는 말이 나오면 눈과 귀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얼마 전에는 캄보디아 공주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13살 제나 노로돔 공주 깜짝 무대, K팝 연습생 꿈꾸는 캄보디아 '국민 여동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기사를 읽으며 나는 다시 캄보디아의 시간으로 잠시 돌아갔다 왔다. 방송에 나온, 캄보디아 범죄도시에 관한 것이나 모 종교단체에서 캄보디아 사업을 위해 로비를 했다는 것을 보면서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캄보디아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일 년의 시간을 보내고 난 지금 캄보디아는 결코 낯선 나라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제는 그냥 스쳐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야기에 내가 웃을 수 있고 또 얼굴을 찡그리며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한다. 캄보디아에서 보낸 일 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해외 봉사활동을 가기 전, 나는 무엇을 위해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당시에는 머리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었다. 코이카의 정신에 따라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 않겠냐 하는, 아주 원론적인 생각만 가지고 캄보디아로 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답이 가슴까지 내려왔다. 이제는 그들의 삶에 대해 흐뭇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움 때문에 조금은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와 더불어 나는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의 꿈이 내 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개깃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온전히 내게 돌아왔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게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꿈을 꿀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난 3월에는 대전에 다녀왔다. 목원대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마리야와 피싸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리야는 작년 9월에 한국에 왔으니 나와는 7개월 가량 같이 공부를 했고 피싸이는 올해 3월에 왔으니 내 봉사활동 기간 동안 온전히 같이 있었던 아이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갈 무렵 교문 앞에서 두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손을 흔들며 두 아이가 달려왔다. 나도 양 팔을 힘껏 흔들며 그 아이들을 만났다. 반갑게 손을 잡으며 잘 지내고 있는지, 공부는 어렵지 않는기 하는 말을 거푸 쏟아냈다. 아이들이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해서 맛집을 골라 찾아갔는데 아이들은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면서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많은 것들을 내게 말해 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고 같이 먹는 삼겹살이 그래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 아이들을 다시 기숙사로 보내고 대구로 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가슴에 머물러 있는 캄보디아를 이제는 두 발로 내려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캄보디아에서 만난 많은 아이들은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이별을 할 때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나도 했고 그 아이들도 했다. 내가 다시 캄보디아에 가기 힘든 상황, 나는 그 아이들이 한국에 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한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내 발길이 그 아이에게 힘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맺은 인연이 담록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피어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내 시간을 더 알차게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말을 해야겠다.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잡초를 뽑고 텃밭을 가꾸면서 내 없는 일 년 동안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 생각한다. 내가 가슴으로 캄보디아 아이들을 안을 수 있다면 그건 아내와 두 아들 덕분이다.

캄보디아에서 일 년 동안 생활하면서 나는 코이카 캄보디아 사무소 소장님과 부소장님, 그리고 코디네이터와 YP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같이 캄보디아에 파견된 동기 단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더운 나라에서 힘들게 생활하고 있을 텐데 도움이 필요한 내게 스스럼없이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그들의 손을 잡고 비로소 더위를 이겨낼 수 있었고 내 일년의 시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해외 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 다시 가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내 형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듯하다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짓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가고 싶다. 그리고 다시 간다면 꼭 캄보디아로 가고 싶다. 그것에서 내가 보낸 일 년의 시간을 다시 이어가고 싶고 또 그 시간 속에 함께 했던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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