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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더 Jul 25. 2023

비교는 요렇게

   한창 공부를 파야하는 고등학생 때 나는 무기력증에 빠졌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도대체 납득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걸 배워서 어디에다 써먹겠냐는 효용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석차가 중요한 고등학교 공부를 내가 한 뼘만큼 할 때 남들도 한 뼘만큼 할 테고 내가 반 뼘만큼 성적을 끌어올리면 남들도 그럴 텐데 석차를 전혀 좁힐 수 없는 공부를 왜 하고 있는지 당최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나는 로봇이 아니고 남들도 로봇이 아니라는 거였다. 한 뼘만큼 공부를 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늘 반 뼘만큼 상승을 하는 건 아니다. 1/3만큼만, 또는 1/10만큼만 상승할 때도 있다. 제자리에 머물 수도 있고, 안타깝지만 하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제나 공부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나도 남들도 공부를 하다가 잠깐잠깐 쉴 거고, 다른 일정도 있을 것이다. 친구도 만나고 아프면 병원에도 가고 종교 생활을 하거나 운동도 할 것이다. 그러니 고등학교 공부에 대해서 '내가 한 뼘만큼 할 때 남들도 한 뼘만큼 할 테고 내가 반 뼘만큼 성적을 끌어올리면 남들도 그럴 거라서 석차를 전혀 좁힐 수 없는' 걸로 판단한 건 순전히 오류였다.


   나는 독서지도사이다. 학생들이 읽어온 책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수업을 한다. 학생들과 책의 내용을 나누고, 나눈 내용을 더 큰 주제로 확장하여 학생들에게 생각해 보게 하고, 그걸 토대로 다 같이 글을 쓰는 시간을 가지고, 토의나 토론도 한다. 그러다 보니 매주 읽어야 할 책이 많게는 다섯 권 이상이 된다. 주마다 모든 학년에 해당하는  책 한 권씩을 읽고, 특강 수업을 할 때는 그 수업을 위한 책도 읽는다. 그나마 초등학생 1~3학년 책은 제외하고 세어본 게 이 정도이고, 수업에 도움이 되어 개인적으로 읽는 이론서까지 합치면 책에 파묻혀 지낸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내향적 성향인 나에게 독서지도사라는 일이 잘 맞다. 수업을 하는 중에 내 눈에 아이들의 마음이 신기할 정도로 쏙쏙 잘도 보인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기부여하면서 이끌어 가기가 참 수월하고 재미있다. 수업 계획에 따라 아이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커다란 기쁨이 된다. 혼자서 조용히 무언가를 할 때 편안해지는 내향적 타입인 나에게 책 읽기는 힐링 활동이다.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문학, 비문학을 읽어야 하는 독서지도사라는 직업은 나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나만의 시간을 선물한다.


   교재 연구 및 책 읽기를 포함한 수업 준비, 그리고 수업 자체는 독서지도사의 공통 업무이고 이외의 다른 업무에까지 도전해서 일궈가는 교사도 있다. 수업 도서를 선정하거나 교재를 집필하고 독서지도사와 논술지도사와 토론지도사를 양성하는 과정을 강의하기도 한다. 나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척척 호흡을 맞추며 신이 나서 수업을 하고, 나만의 시간을 교재 연구 및 책 읽기로 의미 있게 꽉 채운다. 만족스럽고 보람된 일상이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한 이외의 업무까지 하는 교사를 보면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독서지도사로서의 내 전문성을 향상시키고 싶어진다. 그 교사들보다 더 전문가이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마음의 저쪽 한편에서 고등학생 때의 오류 시스템이 스멀스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미 도서 선정 위원, 교재 집필 위원, 여러 양성 과정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교사들이 많을 텐데, 뭐. 그 교사들은 오늘도, 이 시간에도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할 텐데 내가 지금 시작해서 그 교사들보다 잘할 수 있을까. 아니, 그 교사들만큼이나 할 수 있을까. 오류인 걸 알면서도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책을 읽고 수업을 준비하고 준비한 걸 아이들과 한껏 나누느라 만족스럽고 보람되었던 나의 일이 갑자기 보잘것 없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기력해진다.


   하지만 금세 벌떡벌떡 다시 회복하는데, 그건 알차게 준비한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내가 마치 탁구를 칠 때처럼 척척 호흡이 맞아 수업이 좔좔 진행되고 아이들이 술술 발표하며 죽죽 글을 써내려 갈 때이다. 아, 이럴 때의 기분은 그야말로 쾌감이다. 성공하고 성취했을 때 맛볼 수 있는 기분말이다.


   이거면 됐다. 누구누구보다 잘할 수 있을까, 누구누구만큼 할 수나 있을까ㅡ라는 생각에 조바심을 내며 전전긍긍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나도 골을 터뜨린 손홍민의 기분을 나름대로 맛보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수업을 준비하면서, 아이들과 책 이야기를 하면서,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흥분을 만끽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정 부러우면 따라 하자. 로봇은 아니지만 로봇처럼 일관된 생활을 불태우는 멋진 이들이 분명히 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이들의 루틴을 따라 하며 한 발 두 발 떼어 보자. 비교는 오로지 어제의 나와만 하도록 하자. 나를 타인과 비교하며 부러워하기만 하면 이도 저도 안 된다. 나도 잃어버리고 행복도 머나먼 곳으로 도망가 버리고 만다. 비교란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엄격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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