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닉의 중격
"인간은 쌓아가는게 아니라, 없애나가야 한다. 날마다 늘어가는게 아니라, 날마다 줄어드는 것이다. 수련의 최고 단계는, 항상 단순함으로 귀결되듯이 말이다." (이소룡, 배우)
건강한 정신과 신념은 나에게,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독립된 자유를 의미한다. 과거의 아팠던 경험들을 통해,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의탁하지 않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의존이란 단어가 얼마나 뼈저리게 아픈 것인지도 깨달았다. 사랑이나 신뢰로 아무리 포장되었다 한들, 내 안에 숨겨진 본심까지 내보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숨을 쉬고 있는 오늘도, 수 많은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있는 내 모습과 마주친다.
암울했던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의 행복을 꿈꾸며 이곳에 왔다. 해외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2년, 그 동안 사랑하는 사람과 수도 없이 싸웠고 끝 없는 행복을 경험하기도 했다. 부딪혀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알아갔고, 타인이란 존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랑하는 과정의 자극은, 마치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떠났고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홀로 남았다. 이제는 더이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관심도 주고 싶지 않다.
샤프한 내 모습을 사랑했고, 근거없는 자신감은 넘쳐 흘렀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간 이후로,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별의 아픔은, 멍해진 모습의 내 껍데기에 숨만 쉬고 있는 내 심장을 무차별하게 흉기로 난도질했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지기도 하고, 갑자기 소리치고 싶어지는 온갖 충동이 나를 괴롭혔다. 넓은 세상에 혼자 남겨진 지금,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그저 장애물일 뿐이었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 무엇이든 집중할 것이 필요했다. 걷고 또 걷다 우연히 마주친 카지노와 다양한 게임들... 처음엔 화려한 카지노의 분위기에 취했고, 시원한 맥주에 취했다. 그리고 게임에 집중하는 내 모습을 보며 끝없이 취해갔다. 나에게 이곳은 매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이자, 천국이라는 이름의 파라다이스였다. 나는 그렇게 서서히 중독되어 갔다...
곤란한 상황이 거듭 발생했다. 평소와는 다른 상황 전개에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다. 앉는 테이블 마다 승승장구하며, 베팅한 금액이 자꾸만 불어난다. 거듭되는 연승, 블랙잭(Black Jack)의 연속, 스플릿(Split) 성공 등 베팅하는 만큼 터졌다. 그리고 패가 좋지 않을 때 딜러의 버스트(Bust)까지... 한 시간에 한 건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아침의 느낌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바라보니, 테이블을 둘러싼 사람들의 환호성과 축하 소리가 들린다. 나를 따라 옆에서 묵묵하게 베팅하는 중국인 할머니도, 등 뒤에서 시끄럽게 베팅하는 동남아시아 아주머니도, 맥주를 즐기며 환호하는 노란 머리 삼촌도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측을 벗어난 짜릿함에, 흥분된 감정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다. 맥주 한잔 더 마셔야겠다.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카지노 측에서 재빨리 딜러(Dealer)를 교체했다. 테이블에 돌아오니, 빨간 매니큐어가 인상적인 딜러가 나에게 인사한다. 나도 특유의 미소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이 미소는 서로 간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자, 새로운 전쟁의 준비를 의미했다. 오늘은 기세가 오른 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일확천금의 망상이 점점 현실로 다가온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욕망이 자꾸 꿈틀댔다. 언젠가 인상깊게 읽은 팀 페리스의 책에서, 확신에 찬 어투로 그는 말했다. 낭비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에 집중할 시간이 더욱 늘어난다는 것이라고... 승부를 볼 때가 되었다고 확신이 든 순간, 미련없이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칩(Chips)을 챙기는 동안, 아쉬워하는 모기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에게 외치고 싶다. 건강한 신념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된 자유라고.
텍사스 홀덤(Texas hold'em)은 플레이어(Player)카드 2장, 공유 카드 5장으로 승부를 겨루는 대표적인 포커(Poker) 게임이다. 내가 그토록 이 게임에 열광하는 이유는, 딜러가 아닌 플레이어 간 자웅을 겨루는 진검승부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일까. 무엇보다 많은 돈을 따는 것보다 잃지않는 심리 전략과 인내심이, 자석처럼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베팅액이 올라가며, 자칫하면 모든 돈을 잃을 수 있다는 짜릿함에 벌써부터 머리카락 끝이 곤두섰다.
상한액이 없는 게임 테이블을 구경하다,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대머리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창백한 얼굴과 정돈되지 않은 손톱, 너무나도 편해 보이는 옷차림은 마치 노숙자와 같은 인상이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수 많은 칩을 제외하곤 말이다. 고수인 듯 아닌 듯 어정쩡한 모습이, 자꾸 그의 플레이를 관찰하게 만든다. 기다리기를 10여분... 드디어 한 명이 모든 칩을 잃고 일어섰다. 대머리 아저씨와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표정 변화와 미세한 손떨림, 상대방의 관찰 여부에 따라 결과가 바뀔 정도로 이 게임은 심리전이 매우 중요하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파악하기 위해, 수 없이 체크(Check)와 폴드(Fold : 게임포기)를 반복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가면을 쓴 사람들...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가, 아까 마신 맥주의 기운을 전부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문득 삶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본인만 그렇지 않다는 팀 페리스의 흔적이 떠올랐다. 그래... 쫄 것 없다.
척추가 떨리고 온 몸의 신경이 폭발할 것만 같다. 흥분되는 감정을 숨긴 채 게임을 시작했다. 내 손에 쥐어진 두 장(Pre-flop)은 높은 숫자의 동일한 카드, 드디어 기회가 왔다. 바닥에 공통된 3장의 카드가 공개되고,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더욱 고조되었다. 가면 안의 내 감정(Poker-face)이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두려워, 더욱 속으로 평정심을 외친다. 내 감정을 절대 들켜서는 안된다...
오늘은 나를 위한 특별한 하루가 확실하다. 내가 베팅을 하기도 전에, 주변 사람들이 서로 베팅하며 불이 붙었다. 약간 차가웠던 분위기가 갑자기 달아올랐다. 4번째 공통된 카드가 열리고, 모든 경우의 수를 대입해 결과를 예측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 수 없는 게임이다. 내가 베팅할 차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체크(Check : 추가로 베팅하지 않음)사인을 보낸다. 주변 사람들 또한 4번째 카드에 가로막혀 눈치만 보는 분위기, 눈에 띄지 않았던 대머리 아저씨가 갑자기 레이즈(Raise : 베팅액의 두배)를 했다.
이 베팅은 무슨 의미일까. 예측할 수 없었던 그의 행동에 약간은 불안감이 생겼다. 이내 조급함을 버리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다시 한번 카드를 확인해 본다. 분명 질 수 없는 게임인데... 내가 고민하던 사이, 불이 붙었던 주변 사람들 모두 이내 게임을 포기했다. 머릿 속이 복잡해진다.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하기 위해, 일단 콜(Call : 상대방 베팅을 따라감)을 했다. 마지막으로 오픈된 5번째 카드,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불안감은 역시 기우였나보다. 대머리 아저씨를 쳐다보니 표정을 알 수가 없다. 살며시 떨리는 그의 손에서, 감정의 변화가 온 것이 확실해 보였다. 확신이 든 순간, 올인(All-in)을 하며 승부를 걸었다.
대머리 아저씨가 콜(Call)을 한다. 테이블 위에 놓여진 모든 칩을 베팅하자, 갑자기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베팅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불쾌한 느낌은 뭘까. 모든 카드를 오픈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나보다 높은 숫자의 동일한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몸 안에 있던 허파가 갑자기 사라졌고, 숨을 쉴 수가 없다. 그리고 의자에 걸쳐진 내 다리의 오금이 풀렸다. 천장을 바라보니, 호구들을 비웃으며 기네스를 즐기는 순간들이 떠올랐다. 오늘 하루의 모든 것이 꿈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며, 다시는 떠올리기 싫었던 그 느낌이 되살아난다.
실패, 그리고 이별이라는 두 단어... 모두가 떠나가고 그나마 남아있던 내 모든 것을 잃었다.
*건곤일척(乾坤一擲) : 인생이 단 하루만 주어진다면, 운명을 걸고 단판걸이로 승부를 겨루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인생이 과연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