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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al May 12. 2021

Ep.09 :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탐닉의 중격

" 우리 모두는 진흙탕에서 허우적대지. 하지만 이 가운데 몇몇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본다네." (오스카 와일드, 소설가)




태와 증오, 외로움과 절망, 원망과 두려움, 실패와 자책이라는 감정을 인정하기 위해 나는 미쳐야만 했다. 항상 나를 괴롭혔던 부정적 의식들... 비극적 결과에 자책만 일삼았던 나, 습관적 비교로 인한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괴로워했던 나, 현실을 회피하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보낸 나... 보이지 않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나는 살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두운 동굴에서 나오고 싶었고, 나와 다시 친해지고 싶었다. 의지의 실천으로 참가했던 마라톤 대회가 어느새 1년이 지났다. 그리고 지금도 내면의 작은 아이를 알아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경험한 후, 삶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 체력을 길러야 했고, 내 감정을 마구 헤집어 놓았던 알코올과 손절해야 했다. 극한의 다이어트와 운동, 술의 유혹에 저항하며 매일 울부짖었고, 6개월이 지나서야 드디어 한 줌의 신념을 얻었다. 이제껏 나를 괴롭혔던 수 많은 고통들은, 희망을 찾은 나를 더이상 유혹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썩은 물이 고여 있던 그릇을 비워냈다. 그리고 요즘 거울에 비친 변화된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즐거운 일과가 되었다. 슈렉을 연상하는 비대했던 몸이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살이 빠져도 얼굴은 슈렉이네...  



날이 갈수록 들어간 뱃살 덕분에 허리는 더욱 곧게 펴졌고, 패기와 정열이 넘쳤던 과거의 내 모습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눈 앞이 어두웠던 동굴을 벗어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을 이겨낼 수 있었다. 매일 반복했던 모든 긍정적인 루틴이, 드디어 습관이라는 보상으로 자리잡혔다. 그리고 현실에 마주한 내 모습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막대한 빚을 정리하고 난 뒤, 남아있는 건 건강한 몸뚱아리 하나 뿐이지만, 이제는 더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다.



 



가 나올 때까지 일하고 또 일했다. 비록, 해변가에 마련한 작은 펍(PUB)이지만 너무나 행복하다. 손님들과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 기분좋은 소통과 감정들까지... 역시 사람이 돌아갈 곳은 결국 사람인가 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은 강아지도 어엿한 이 가게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어찌된 일인지 날 닮아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없다. 사회성 좋은 녀석 같으니...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은 따로 분리될 수 없다. 날렵한 몸을 되찾으니, 마음의 여유까지 생겨 더욱 신기하다. 사람들과 소통하며 세로토닌이 활성화되자, 불안감 또한 사라졌다. 가끔씩 술에 취한 손님들을 바라보니, 사람들을 회피하며 술에 절어 있던 내 모습, 갈 곳을 잃은 눈동자로 TV만 쳐다보던 과거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부끄러웠던 지난날의 내 기억들, 행복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번 되뇌어본다. 딱히,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이것 만은 확실하다. 반복된 시련의 고통 속에서 위기를 이겨낸 내 모습이 자랑스럽다. 바로 지금, 나는 행복하다.  



펍(PUB)을 준비하며, 여러가지 힘든 시련과 다시 마주했다. 빚을 정리하며, 남아있던 몸뚱아리 하나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거래처에 전화나 이메일을 돌리기 시작했고, 과거의 좋았던 기억 때문인지 그들 또한 딱한 나의 사정을 감안해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술에 중독되었던 탓인지 누구보다 술에 대한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고, 누구나 건강하게 술을 즐길 수 있는 안락한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해외 거래처 또한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하우스 와인(House Wine)과 맥주 등을 지원하며 나의 재기를 도와주었고, 어느 해변가에 조그만 공간을 찾아 본격적인 사업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집을 연상하게 하는 안락한 분위기 때문인지, 주로 혼자 찾는 손님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네모난 바(Bar) 위에 각각의 LCD 브라운관을 설치하여, 다양한 채널을 시청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덕분에 가게는 다양한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고, 경마를 시청하는 사람, 주식과 부동산에 미쳐있는 사람, 게임에 미쳐있는 사람 등 이 곳은 중독된 사람들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대화를 원하는 손님들에게 나는 특유의 미소로 그들과 마주하고, 내 장점인 친화력으로 매끄러운 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의 인생은 바닥을 찍고 볼 일이다. 



가끔씩 성과가 없을 때, 지독한 불안이 나를 찾아올 때가 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갑자기 찾아오는 공허함에 술이 생각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옥과 같은 지난날의 경험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괴롭힐 때면, 생각을 차단하고 강제로 수면에 드는 것이 필요했는데, 막상 시도해보니 매일 밤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은 덜 중요했다. 다만,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알콜 중독을 이겨내기 위한 나의 수 많은 노력들...드디어 머릿속 블랙홀에 숨어있던 세로토닌이 분비되기 시작했다.



 



격(Septulum)이란, 작거나 이차적인 격벽을 뜻하는 단어로, 주로 의학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나에게 중격은 인간의 한계점, 이성의 고리가 끊어졌을 때 세상을 외면하고 스스로 통제되지 않는 괴물이 되어가는 섬뜩한 단어로 각인이 되어있다. 누구보다 중독의 아픔을 잘 알기에, 이 단어의 의미를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요즘이다. 



오늘도 역시 술에 취한 사람들로 가게는 붐볐다. 갈 곳을 잃은 듯한 저 눈빛들... 이전의 내가 그랬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부끄러워진다. 바(Bar)의 구석진 자리에서 조용히 기네스(Guinnes)를 마시고 있는 한 청년이 보였다. 샤프한 얼굴과 훤칠한 키, 예사롭지 않은 화려한 복장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왠지 호랑 족제비 같은 느낌을 주는 손님이다.



특유의 포근한 미소로 호랑 족제비와 대화를 시도했다.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호랑 족제비의 단답으로 대화가 계속 끊긴다.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일단 자리를 피했다. 옆 바(Bar) 테이블에 앉은 다른 손님과 대화를 즐기는 동안, 지속적으로 호랑 족제비를 의식한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독특한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까.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옛날 마라톤 때 오덕후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다. 하... 이 놈의 관심병... 



한창 대화를 즐기고 있는데 다른 손님이 말했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게임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은 적군도 아군도 아닌 그냥 흘러가는 존재들이라고. 그리고 서로를 향해 겉으로 미소짓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필요에 의해 서로를 이용하는 잠재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구석에 앉아있던 호랑 족제비가 놀라는 표정으로 이 쪽을 바라본다. 대화를 계속하다보니, 이 말을 한 손님은 근처에 홀덤 펍(Hold'em PUB)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허가가 나오지 않아 골머리를 썩고 있다나... 이 말을 들은 호랑 족제비가 갑자기 눈을 번쩍이며 가게를 나간다. 참, 기억에 남는 친구네...






미네이트(Laminate)를 한 것처럼,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돋보이는 예쁜 손님이다. 어쩐 일인지 여신과 같은 외모의 젊은 손님이, 혼자 바(Bar)테이블에 앉아 보드카 칵테일을 주문한다. 또 뭔가 사연이 있는 분위기... 주문한 칵테일을 전달하며 특유의 미소로 인사를 전달한다. 그녀도 대화가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는다. 그리고 가게에 대해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무슨 사연일까...



여신의 이야기에 좀더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녀는 프리랜서 방송 활동을 하고 있으며, 요즘 수익이 불규칙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했다. 부가적으로 자기관리에 많은 비용이 들며, 외모만 보고 접근하는 음흉한 남자 고기들 때문에 더욱 힘들다고 한다. 뭔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무엇보다 왜 그렇게 남자들을 불신하는지 원인이 궁금했다. 차마 이 질문을 할 수 없어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때, 어떤 남자가 너무 밉다고 한다. 누굴까...  



그녀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렇다. 1년 전, 어떤 게임에서 알게된 덕후가 본인을 너무나 좋아해 쫒아다녔고, 그녀는 그 남자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본인이 방송하는 채널로 초대했고, 그는 많은 별풍선을 선물해줬다. 계속되는 구애와 집착에 그녀는 재빨리 그를 손절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자신과 동일한 방송 플랫폼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전문적인 게임 방송을 하며, 디테일한 게임 진행과 굵직한 목소리로 최근 들어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갑자기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고 했던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에게 DM(direct message)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어 결국 자존심이 상했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위기를 기회로 바꾼 아주 현명한 대처와 자세가 내 관심을 자극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생각과 행동이었다. 그 남자의 이야기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미소짓고 있는 내 표정을 보고, 그녀의 인상이 무섭게 변한다.  



봄비가 촉촉하게 떨어지는 어느 날. 변함없이 바(Bar)를 열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는데, 왠지 낯이 익은 손님이 가게로 찾아왔다. 오덕후다...  




*권토중래(捲土重來) : 실패는 성공을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성공을 원한다면, 빠르게 실패를 수용하고 슬럼프를 벗어나는 마음가짐이 먼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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