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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라봉 Aug 25. 2019

일상의 근심이 없는 곳에서 할 일

한달살기 여행의 목표 다섯 가지


영화를 보 맥주를 마시는 유럽의 밤은 한국에서의 밤과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행복할까. 다가오는 날이 걱정으로 가득한 밤과 기다려지는 밤의 차이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이유가 행을 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좀 더 분명한 이유는 당장 내일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가지 않기만 하면 한국에서도 이런 기분일까. 남편에게 물어봤다.


"지금이랑 똑같진 않을 거 같아. 여기가 더 마음이 편해."


한국에서 쉬는 것과, 해외에서 는 건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할 일이 생겼다. 누가 강요하지 않지만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드는 의례적 무언가. 만나야 할 인간관계, 내 것이 아닌 기념일에 대한 의무, 지인들과의 연락, 타인으로 인해 생기는 근심, 회사와 나의 사이...  여러 가지 생각들로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때로는 좋아서 하는 것들도 그렇게 느낄 때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그런 일상의 근심이 없다. 가지고 온 물건과 남편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면 된다. 타인과의 관계에 이전만큼 영향받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휘둘릴 상황도 없었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자, 그들의 최신 소식이 업데이트되는 속도도 느려졌다.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방해되는 것 없으니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원하는 만큼 몰두할 수 있었다.



일상의 근심이 없는 곳에서 할 일


남편은 회사를 다닐 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회사 다니기를 해내는 것'이 목표였다. 내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달살기 여행 동안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남편은 스케치북을 샀다. 유럽의 아침, 나보다 더 빨리 일어나 스케치 강의를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작은 연필깎기도 준비했다. 생각보다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하고 싶은 것들을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거창하지 않더라도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적다. 큰 의미가 없더라도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 적어놓고도 부담이 없었다. 휴식 같은 한달살기 동안 이 다섯 가지나 해봐야지, 하고 볍게 여행의 목표로 정했다. 해야 하는 일이 달리 없었기 때문에, 목표를 정하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보채는 사람도 없고, 반대로 안 한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이 다섯 가지에 푹 빠지게 되었다. 여행의 소소한 재미가 되었달까.


여행 어플에 방문 식당과 명소 리뷰를 남겨 최고 레벨이 되면서, 덩달아 블로그도 여행 이야기가 많아졌다. 거의 매일 쓰는 일기에는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가계부를 분석하는 내용이 등장했다. 그 일기 다시 정리되어 블로그에 포스팅되었다. 유럽에서 직접 요리하는 한식도 사진과 함께 정갈하게 올라갔다. 블로그를 읽는 이웃이 점차 늘어났다. 유럽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현재 한달살기 여행을 하는 사람, 한달살기 여행을 준비 중인 사람들과 자주는 아니지만 조금씩 소통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누군가 포스팅을 읽은 흔적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아침과, 가계부 정리하는  반복되었다. 완전히 집중하여 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몰입하는 건 놀라운 느낌이었다. 출근하고 정신없이 일하다가 벌써 점심시간인걸 알고 놀라듯이, 문득 시간을 보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어떤  일을 하다 보면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좀 더 알아보고 싶고, 이전보다 시간을 들여 고민하게 된다. 그 느낌을 따라 깊숙이 파고들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길이 열릴 때가 있다.

그렇게 나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인지했다. 일기를 쓰는 것도, 블로그를 하는 것도 결국 내 이야기를 적는 일. 꾸준한 활동 속에서 글쓰기 자체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내게 글쓰기는, 남들처럼 '언젠가 기회가 되면...'이라는 말이 붙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관점을 다르게 해서 살펴보면 사실 매일 글을 쓰고 있었다. 남이 보는 글이든 그렇지 않든.

 

누군가 내게 '무슨 일을 좋아해?' 또는 '뭘 하고 싶어?'라고 묻는다면 다섯 가지를 대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은 더 그럴듯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쓰기를 좋아해요. 블로그를 운영하기도 하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도 해요."


변한 건 크게 없는데도 무엇을 좋아하는지  명확하게 알았다는 것에, 한동안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내 안의 오로라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꾸준히 못했지만 띄엄띄엄이라도 일기를 쓰고,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메모에 글을 적는 게 습관이었던 내 모습이 시그널이었는데, 왜 이제야 알아차렸을까.


자발적으로 열정을 보탤 수 있는 일을 오랫동안 찾았다. 동시에 그런 일들을 외면했다. '그런 일에 신경 쓸 바에 해야 하는 일을 충실히 하자'는 생각과 '나만의 무언가를 찾고 싶다'는 욕구는 늘 부딪혔다. 집중해야 할 일은, 나는 아직 합하지 못했지만 동료들은 벌써 취득한 업무 자격증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상황 탓을 하려는 게 아니다. 가 선택한 것은 늘 회사와 관련된 일이었고,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들여다보는데 더 시간이 걸렸음을 말하고 싶다. 즐겁게 하지는 않았지만, 취득한 자격증은 내게 성취감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자격증을 따면, 내게 없는 또 다른 자격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상황이 늘 족쇄처럼 느껴졌다.

결국 후순위로 미루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시도하지 않은 건 나였다. 거기에 할 시간이 없다고 불만도 가졌다.


결국 내게 필요했던 것은 그 우선순위들을 다 제치고 좋아하는 것을 시작할 계기와 에너지 아니었을까. 한달살기 여행 동안 넘치는 시간은 계기가 되었고, 여유는 자연스럽게 활력을 주었다.

여행 동안 으른 생활이 난무할 줄 알았다. 회사를 다니며 늦잠자지 못한 것을 뽕 뽑을 마음도 있었다. 딩굴대다가 커피를 마시고 산책하는 하루일 줄 알았는데, 글을 쓰면 이전보다 더 부지런해졌다.

내가 쓴 글의  깃털 같을지 모른다. 그러나 글쓰기를 향한 열정은,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프라하 한달살기 + 크로아티아 한달살기 = 총 두 달의 한달살기 여행을 하며 느낀 것들을 글로 표현하였습니다.

 * '한달살기'를 명사처럼 쓰고 있습니다.

 

*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래 전자책에서 완성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휴직하고 떠난 유럽 한달살기 여행(프라하, 크로아티아 유럽 한달살기 여행 지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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