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치적"이라는 말이 부정적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예술 작품, 특히 문학이나 영화에 "정치적이다" 내지는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표현은 해당 작품에 대한 비판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원래 모든 예술 작품은 정치적이다.
영화로 한정해서 이야기해 보자. 모든 작품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영화 속에 반영된 '현실'은 카메라를 통한 촬영이라는 작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이상과 같은 문제의식을 전제로 하고 다음 단계의 논의로 넘어가 보자.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의지의 승리>도, <전함 포템킨>도, <국민의 탄생>도, <캣츠>도, <조커>도, 모두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 각각의 작품이 가진 정치적 의미는 지워진다.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실제로는 역설적으로 "모든 영화가 비정치적"이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모든 영화가 정치적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가 어떤 정치성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정치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의 할리우드 영화가 실망스럽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할리우드 영화가 트럼프 정부의 입맛에 맞춘 영화들을 생산해 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할리우드는 트럼프 정부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할리우드가 예전부터 민주당 지지 성향을 보였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 트럼프에 대한 비판 자체에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 부분이 있다. 문제는 트럼프 시대에 나온 영화들의 정치성이 유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전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날카로운 정치적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다. 반면에 최근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지나치게 성급하게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다루려 하는 바람에 영화적 완성도를 희생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어떤 정치적 배려에서인지 몰라도 트럼프에 대한 비판 비슷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들을 수상하기까지 한다.
트럼프는 할리우드를 자기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16년 대선에서도 할리우드 셀럽들은 트럼프를 비판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트럼프였다. 물론 할리우드 셀럽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찍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위기의 시대에야말로 뛰어난 작품들을 배출해 왔던 할리우드가 트럼프에 대해 반대하기만 하면 호평을 받는 수준으로 내려왔다면 트럼프가 결과적으로 할리우드를 타락시켰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트럼프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시대정신은 이쪽이냐 저쪽이냐의 선택을 강요하는 이분법의 폭력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며 혐오발언을 일삼는 이들은 물론, 트럼프를 비난하는 반대파들 역시 이러한 이분법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진정한 문제다. 사회의 분열이 커지면 커질수록 트럼프는 웃는다. 트럼프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의 힘을 강화시키는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트럼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트럼프 시대의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그런 문제들을 고민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여느 때보다 큰 사회의 위기를 겪고 있다. 좌우 갈등, 인종 갈등, 성 갈등, 빈부격차의 확대, 마약의 만연 등등... 할리우드 영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영화와 정치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