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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Dec 19. 2021

중우정치의 상징, 청와대 국민청원



JTBC의 드라마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이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이어졌다. 오늘 올라온 <드라마 설** 방영중지 청원>은 하루 만에 20만 명이 넘는 서명자를 모았다. 드라마 자체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이 청원은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역사왜곡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과 민간 방송사의 드라마를 정부가 방영 중지시키기를 청원하는 것. 어느 쪽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후자가 더 심각한 문제인 것 같은데 말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중우정치의 상징과도 같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이어 만들어진 국회 국민청원은 이해가 된다(물론 문제도 많지만).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이고, 국회에 특정한 의제의 입법을 요구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와 부합한다. 반면, 청와대 국민청원의 경우, 답변된 청원의 대부분이 입법부나 사법부 등 대통령의 권한 밖에 있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삼권분립을 위협한다. 그 내용도 사법부의 판단을 뒤집을 것을 요구하는 등, 헌법, 법치주의, 인권에 위배되는 청원이 많다. 대통령이 사법부 대신 판결을 내리고, 입법부 대신 법을 제정하고, 방송국의 방송 내용을 변경시키는 등 사회 모든 영역을 주관하게 된다면, 그런 정치 체제를 독재라고 부른다.


물론 낙태죄 폐지나 차별금지법 제정 등 필자가 개인적으로 찬성하는 청원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찬성할 수 있느냐 여부와는 별개로 청와대 국민청원 제도는 문제가 많다.


청와대 청원에는 동의자가 20만 명을 넘기면 답변을 하도록 되어 있다. 20만 명은 많은 수이긴 하지만, 5천만 명의 국민 중에서는 250분의 1에 불과하다. 헌법이나 인권은 다수가 찬성한다고 해서 침해해서는 안 될 문제지만, 청와대 국민청원은 국민 다수의 여론이라고 보기에도 어렵다. 흔히 응답자가 1000명인 여론조사가 어떻게 국민 여론을 반영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표본을 무작위 추출할 경우에는 가능하다. 청와대 청원에 참가하는 20만 명이라는 숫자는 무작위 추출이 아니며, 인터넷을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선택 편향이 존재한다. 20만 명은 그러한 편향이 증폭된 수치일 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보다도 국민 여론을 대변한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것이다.


이성에 기반한 토론이라는 건전한 공론장은 실종되고, 20만 이상을 동원하기 위한 여론몰이가 남았다. 사실 관계가 부정확한, 혹은 명백한 허위 사실이라도 많은 대중을 동원하기만 하면 청원으로서의 정당성을 얻게 된다. 반면에 아무리 중요하고 절실한 의제라도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린다. 청원의 의제에 대한 정당성 여부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대신, 될 수 있는 한 다수의 동원을 얻기 위해 감정에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청원은 진영 간의 동원 경쟁으로 번진다.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이 나오면 민주당 해산 청원이 나오고, 문재인 대통령 탄핵 청원이 나오면 그에 대한 반대 청원이 나온다. 차별금지법 제정 청원이 나오면, 차별금지법 반대 청원이 나온다.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의제에 대해서 수십만 명 단위의 사람들이 찬성하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주연한 영화 <브렉시트>에서는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다뤄진다. 이 영화에서는 건전한 토론 대신 더 많은 투표를 동원하기 위한 선동으로 이어지는 국민투표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청와대 국민청원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국민투표보다 심각하다. 국민투표는 최소한 유권자의 다수의 선택을 묻는다는 점에서 정당성이 있지만,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은 다수인 지도 불분명한 인터넷 여론에 좌우된다. 브렉시트 투표에 참가한 사람들은 청와대 국민청원에 참가하는 사람들보다는 진지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직 청와대 국민청원이 사회적 갈등을 증가시키고, 행정 비용과 청원인들의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최대 야당을 해산시키지도, 특정 종교를 불법화하지도, 형이 확정된 수형자의 형기를 연장하지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청와대는 국민 청원 참가자들의 요구에 반해서 삼권분립이나 인권, 자유 등의 가치를 지키고 있다. 아직까지는.


현 정부 성선설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국민청원이 문제 있는 내용으로 점철되더라도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지는 않으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 대신 다른 단어가 들어가면 어떨까? 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를 대입해도 안심할 수 있을까? 다음 정권에서도 국민청원이 악용되지 않을 수 있을까?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20년 뒤에 헌법과 인권을 비롯한 기존 제도의 정당성을 무시하는 지도자가 청와대에 들어가고, 국민 여론이 이를 뒷받침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민청원에 따라 최대 야당이 해산되고, 소수자의 인권이 박탈당하고, 이웃 나라와의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걱정이 기우로 끝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국민청원의 위험성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2022.10.24. 추가)


필자의 기우와 달리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국민청원은 사라졌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몇 안 되는 윤석열 정부의 잘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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