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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Jul 14. 2021

이미 무기징역 선고까지 받은 범인을 잡아달라는 국민청원

필자가 중우정치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청와대 국민청원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청원들을 보면 삼권분립, 죄형법정주의, 무죄추정의 원칙, 일사부재리, 기본권을 경시하는 국민이 얼마나 많은 지 실감하게 된다.


최근에 주목할 만한 국민청원이 올라왔다(현재는 비공개). 자살로 위장된 연쇄살인사건을 재수사해 달라는 청원이다.


비공개 처리되기 전 청원인이 근거로 올린 기사 링크를 확인해 보았다. 청원인이 언급한 다섯 사건 중 유독 이상하다 생각된 기사는 네 번째였다. 기사에는 용의자를 상대로 수사 중이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타살 혐의점이 없다며 수사 종결"되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추가로 검색을 해 본 결과, 해당 사건의 범인은 자백을 한 후 기소되어 올해 4월에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최신종 2심도 '무기징역'…"잘못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아" ::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청원인은 "2021년 5월 12일"이라고 적었지만, 실제로는 "2020년 5월 12일"의 기사였던 것이다.


범인은 신상이 공개되었고,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사건의 상세한 내용이 다뤄질 정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타살 혐의점이 없다며 수사가 종결"되었다며 재수사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오다니, 황당한 일이다.


해당 사건의 자세한 내용을 읽어 보고 이토록 끔찍한 살인 사건을 일으킨 범인에 대해 혐오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사실 관계가 잘못된 내용이 청와대 청원에 올라왔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청원인은 본인이 근거로 제시한 기사를 모두 읽어보았을까? 만약 정말 기사를 읽었다면 필자와 유사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용의자를 수사 중이라는데 범인이 안 잡혔다고?->범인 잡혀서 무기징역 선고까지 받았네. 뭐지?-> 작년 일이구나).


아니, 최초에 청원을 올린 사람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필자 역시 지금이 2020년인지 2021년인지 헛갈리곤 한다. 문제는 청원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수만 명(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하루 만에 3만 3천 명을 넘겼고, 필자가 마지막에 확인했을 때는 10만 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 달하는 사람들이 청원글에 링크된 기사를 직접 읽어보는 최소한의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의 사소한 착오가 집단지성에 의해 정정되기는커녕 확산되며 증폭되었다는 데서 문제의식을 느낀다.


사실 관계가 잘못되었지만 자극적인 글은 쉽사리 확산되지만, 사실 관계를 검증하는 글은 쓰는 데 시간과 노력이 드는 반면, 잘못된 사실보다 확산되지 않는다.


잘못된 정보가 사실 관계 확인을 거치지 않고 확산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어서 지적할 문제는 사실 관계와는 별개로 논리의 문제다. 청원인이 제시한 사건 중 네 번째 사건은 사실 관계가 잘못되었음을 확인했지만, 나머지 네 사건에 대해서는 사실 관계에 대한 판단을 내릴 능력이 필자에게는 없다. 수사기관이나 언론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 필자가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인 2차 정보뿐이다. 설사 시신의 상태 등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정보를 바탕으로 타살 여부를 판단할 법의학적 지식은 없다.


따라서 청원인의 주장대로 네 사건(혹은 그중 일부)이 타살일 가능성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청원인의 논리에는 비약이 있다. 그렇기에 타살설을 지지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일단 청원 글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부분은 "연쇄살인"이라는 말이다. 네 사건이 경찰의 수사와 달리 타살일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각각 다른 범인이 저지른 네 건의 무관한 살인 사건이거나 한 명의 범인이 저지른 연쇄살인이거나. 청원인이 "연쇄살인"이라 판단한 근거는 아마도 옷 일부가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뿐인데 과연 연쇄살인이라 보기에 충분한 근거일까? 


더 심각한 비약은 "자살로 위장된 살인 사건"이라고 청원인이 단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원 글의 제목에는 "자살로 위장한 연쇄살인"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본문의 글을 보면 "타살 혐의점이 없다며 수사 종결"이라고 나온다. 타살 혐의점이 없다는 말이 자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3의 가능성이 있다. 사고다.


실제로 충북 괴산에서 있었던 첫 번째 사건에 대해서는 자살이 아니라 저체온증이라는 결론이 나왔다(저체온증·동상에 ‘사망’까지… ‘한랭손상 주의보’ < 사회 < 기사 본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dynews.co.kr)). 즉, 청원 글의 주장과는 달리 이 사건은 자살로 위장한 적이 없고 사고로 처리된 사건이다.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의 경우, 뇌가 이상을 일으켜 옷을 벗는 이상 탈의 현상이 발견된다. 청원글의 사건 중 세 건이 12월과 1월에 발생한 사건이다.


위에 링크한 기사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해 경찰이 국과수에 부검을 의뢰했다고 나온다. 만일 청원인의 주장대로 네 사건이 타살이라면, 괴산, 청양, 공주, 대구 경찰과 국과수가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다. 필자가 CSI 시리즈를 본 바로는 목을 조르면 흔적이 남고, 칼로 찌르면 찌른 흔적이 남고, 약물을 투여하면 몸에서 약물이 나오기 마련이다.(청원인은 범인이 어떤 수단으로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자살로 은폐했다는 가설을 세웠던 것일까?) 몸싸움이나 성폭행의 흔적 역시 마찬가지다.


"방구석 CSI의 추측보다는 수많은 사건들을 수사하는 경찰과 국과수가 진실일 것이다!"라고 권위에 의존한 논증을 할 생각은 없다. 실제로 경찰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4개 지역 경찰과 국과수가 잘못된 판단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국 각지의 경찰과 국과수가 의심스러운 사건은 은폐하기로 작당을 한 것일까? 공교롭게도 같은 실수를 한 것일까? 연쇄살인범이 경찰과 국과수의 눈을 속이는 트릭을 구사한 것일까?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철학 용어가 있다. 불필요한 가정을 배제하고 단순한 가설을 선택하라는 법칙이다(오컴의 면도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경찰과 국과수가 타살의 혐의점이 없다고 발표했을 때, 가장 단순한 가설은 타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오컴의 면도날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복잡기괴한 현실 세계에서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악의, 실수, 우연으로 인해 경찰과 국과수가 타살을 자살이나 사고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근거는 빈약하다. 청원인은 피해자가 여성, 옷 중 일부가 탈의, 타살 혐의가 없음이라는 세 가지 공통점을 들고 있는데, 타살설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 공통점이 있는 사건들만 청원인이 모았기 때문이다. 이미 범인이 잡힌 2020년 사건까지 근거로 제시한 것을 보면 키워드를 검색해서 조사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결국 청원글의 근거는 옷이 벗겨졌으니 타살이어야 할 것 같은데 타살이 아니라니 이상하다는 것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필자는 해당 사건들이 타살이 아니라 자살 혹은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판단을 내릴 정보와 지식이 부족하다. 이는 청원인이나 청원에 동참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찰과 국과수의 판단대로 자살/사고인지 혹은 타살인지를 판단할 정보와 지식을 가진 주체가 있다면 언론이다. 해당 청원은 많은 언론에 의해 보도되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주요 일간지 역시 다루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사는 해당 청원의 내용을 소개하고 기껏해야 "누리꾼 반응"을 인용하는 것뿐이다(옷 벗겨진 시신 잇단 발견…"자살로 위장, 재수사해라" 靑 청원 등장 (news1.kr)).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괴산, 청양, 공주, 대구의 경찰서에 취재를 해서 그러한 판단을 내린 경위를 파악하고 법의학자에게 타살 가능성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아니, 한국의 언론 현실을 생각하면, 언론이 발로 뛰는 취재를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게 잘못일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 검색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청원 글에 나온 전북 완주에서 벌어진 사건의 범인이 잡혀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본 바로 그러한 기사는 없었다.


경찰이 타살 혐의 없음이라고 결론지은 사건에 대해 뚜렷한 근거 없이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몇 달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한강 의대생 실족사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한강 의대생 사건과 달리 특정인을 범인으로 몰아 마녀 사냥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스럽다(바꿔 말하자면, 구체적인 용의자가 없기에 타살이 아니라는 반증도 어렵다. 아마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살인범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강 의대생 사건은 유족이 경찰의 결론에 납득하지 못하고 의혹을 제기한 것은 심정적으로 이해가 간다. 조회수를 돈벌이로 이용한 유튜버를 제외하면, 유족의 주장에 동조한 대중은 정의감과 공감에서 나왔을 것이다. 자살로 위장된 연쇄살인 사건을 재수사해 달라는 청원에 동참한 수만 명과 마찬가지로.


문제는 해당 청원의 "연쇄살인 사건"의 유족이 재수사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기사 몇 개를 짜깁기해서 청원을 올린 것이다. 자살이나 사고, 타살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는 차마 짐작하기 어렵다. 주관적으로는 그 어떤 정의감이나 공감의 발로라 할지라도 유족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뚜렷한 근거 없이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자살로 위장된 연쇄 살인사건" 청원은 대중의 불안과 공포, 부정확한 정보, 경찰을 비롯한 공적 기관에 대한 불신, 언론의 기능부전이 만난 상징적 사례다.


해당 청원은 현재 비공개 처리되었다. 범인이 무기징역 선고까지 받은 사건까지 연쇄살인으로 묶었을 정도로 근거가 빈약한 청원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또 다른 음모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국민청원은 유언비어와 음모론을 재생산하는 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이상, 아무쪼록 정부나 언론이 사건의 진상을 가감 없이 밝혀주기를 바랄 뿐이다.


(2022.10.24 추가)


가짜 뉴스는 가짜 뉴스를 정정하는 정보보다 훨씬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이 글도 그다지 많이 읽히진 않았으니 청원에 동참했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러한 연쇄 살인이 있었다고 아직도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런 소동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동과는 별개로 심각한 사건이 있었다. 2022년 3월, 포항에서 달리던 택시에서 뛰어내린 20대 여성이 사망한 사건이다. [전국]'달리던 택시서 뛰어내린 여성 사망' 운전자 2명 송치 | YTN 택시 기사가 행선지를 잘못 알아듣고, 다른 곳으로 향하자 불안을 느낀 여성이 뛰어내린 것이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사건이다. 일차적으로는 여성의 불안을 해소하지 않은 택시 기사의 대응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달리던 택시에서 뛰어내리는 위험한 행동을 하게 한 데는 범죄에 대한 불안이 그 원인으로 지목될 것이다. 필자 역시 인터넷에서 택시에 탔는데 위험하다 싶으면 뛰어내리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그 자체도 문제지만, 범죄에 대한 불안을 무분별하게 조장하는 인터넷 여론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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