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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욱 Jan 30. 2022

표현의 자유

<설강화>와 '시민 독재'

드라마 <설강화>는 청와대 방영 중지 청원, 국가보안법 고발, 방영 금지 가처분 신청에도 불구하고 방영을 계속하고 있다. <설강화>는 비교적 가까운 시대의 현대사를 다루면서 실제 인물과 사건을 연상시키는 설정을 부주의하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나 행정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방영이 중지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설강화>에 대한 청와대 청원이나 사법부에의 고발이 오히려 <설강화> 방영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영 이전 있었던 청와대 청원에 대해 지난해 7월, 청와대는 "민간에서 이뤄지는 자정노력 및 자율적 선택을 존중"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설강화를 옹호하는 해외 팬들은 청와대에서 허가했는데 왜 문제냐고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연히 청와대가 방송국의 개별 프로그램의 방영을 허가하거나 금지하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해외 팬들의 반응은 청와대 입장을 오해한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청와대에 판단을 물어서는 안 될 사안을 청원에 올린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설강화>를 비판하는 이들의 근거는 "역사왜곡 드라마"라는 것이다. <설강화>는 역사적 사실을 주장하는 논문이나 기사, 다큐멘터리가 아닌 창작물이기에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역사왜곡 드라마라고 치자. 그렇다면 다음으로는 역사왜곡 드라마라고 해서 방영이 중지되어야 할까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역사왜곡 드라마'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거나 시청률이 낮은 것은 합당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방영을 중지시키는 것은 '역사왜곡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조건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한되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국가 권력에 의한 제한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드라마를 비판할 자유도, 보지 않을 자유도 있다. 그러나 청와대나 법원에 드라마 방영 중지를 요구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심각한 위협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드라마를 비판하든 옹호하든 시청자가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도록 방영하는 것이 옳다.


여담으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비판을 하려면 드라마를 보고 비판하는 것이 타당하다. 얼마 전 <설강화>에서 명동성당이 간첩 접선 장소로 그려졌다는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실제로 드라마 속에 나온 성당은 명동성당이 아니라 다른 성당이었다. 그러자 <설강화>를 비판하는 이들은 명동성당이 아니라 하더라도 민주화 시대 당시의 가톨릭의 역할을 생각하면 간첩이 성당에서 신부로 위장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일리 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애초에 드라마에서 명동성당이 간첩 접선 장소로 이용되었다는 허위 사실이 확산되었다는 문제는 지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극 중에서 안기부장이 "우리 회사 직원은 회사 직원의 목숨보다 국민의 목숨을 보호해야 한다"는 대사가 안기부 미화라는 이유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드라마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해당 대사만으로 드라마가 안기부를 미화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하다. 만약 실제로 드라마에서 해당 캐릭터가 말 그대로 국민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인물로 그려진다면, 안기부 미화라는 비판도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드라마 속의 평소 모습이 그와 정반대라면 해당 대사는 오히려 안기부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대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판을 하려면 드라마를 보고 비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비판이 될 것이다. 오히려 비판을 하려면 옹호를 할 때보다 해당 작품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독해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설강화>가 역사왜곡 드라마인가 아닌가의 문제와 <설강화>의 방영이 중지되어야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받는다면 다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볼테르의 명언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볼테르의 전기 작가가 한 말이다. 그러나 누가 한 말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볼테르라는 권위가 없더라도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지극히 타당한 태도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기에는 어려운 태도임에도 분명하다. 우리는 종종 박해받아도 될 의견을 동의하지 않는 의견으로 동일시한다.


볼테르의 (말로 잘못 알려진) 명언의 정신은 시인 김수영이 1960년에 쓴 <김일성 만세>라는 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김수영은 시에서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는 것이 "한국의 언론 자유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필자는 '김일성 만세'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할 자유 자체는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한번, 드라마의 내용 자체와는 별개로 생각해 보자. 설령 <설강화>가 아무리 역사왜곡 드라마라 할지라도 청와대에 청원하거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발하거나 방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여기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설강화> 같은 드라마를 비롯해 영화, 소설, 예술 작품 및 논문이나 기사 등은 그 내용이 어떻든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지켜져야 한다. 물론 이를 비판할 자유는 있다. 흔히 하는 이야기지만, 표현의 자유는 비판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국가 권력에 의한 제한을 뜻하며, 개인의 비판은 해당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의 이야기는 앞의 내용과 다소 다르다. 예를 들어 청와대나 법원의 개입으로 <설강화>가 방영 중지되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지만, 개인들이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설강화>를 비판한 결과로 JTBC가 방영을 중지한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침해된 사례가 아닌 것일까? 필자는 오늘날에는 국가권력에 의한 검열뿐 아니라 대중에 의한 비판 역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화가 주호민은 이에 대해 "시민 독재"라고 표현했다. 


지금 웹툰이요, 검열이 진짜 심해졌는데 그 검열을 옛날엔 국가에서 했잖아요? 지금은 시민이, 독자가 합니다.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물론 "시민 독재"라는 표현은 부정확하다고 해야겠지만, 주호민의 문제의식 자체는 타당하다.


주호민이 이 발언을 한 것과 비슷한 시기, 기안84의 만화 <복학왕>이 논란이 되었다. 봉지은이라는 여성 캐릭터가 해달처럼 누워서 조개를 깨서 채용된다는 내용이 성상납을 연상시킨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비평이나 비판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해당 작품의 연재 중단 요구까지 비화되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웹툰협회는 퇴출 요구는 파시즘이라고 반박했다. 필자는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남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 경우에는 대중에 의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그리 빗나가지 않은 것 같다.


필자는 기안84의 평소 언행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공감하고 동의한다. 하지만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판단해야 하고, 단순히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비평을 넘어 작품의 퇴출을 요구하는 것은 선을 넘었다.


첫째, 작품에 대한 해석은 독자에 따라 다를 수 있고, 조개를 깨서 채용된다는 것이 성상납을 의미한다는 해석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기안84는 그러한 의도가 없었다고 말했다. 일방적 해석만으로 작품 연재 중단까지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둘째, 어떤 범죄나 악행이 작품 속에 그려진다고 해서 작가, 혹은 작품이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논리대로라면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살인 사건을 유발하므로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김기덕처럼 창작 과정 그 자체가 실재하는 인물에 대한 가해 행위일 경우는 논외다. 


셋째, 작품에 대한 비평 차원에서는 비판을 하더라도 연재 중단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의 검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도 인기 만화가였던 기안84의 작품이 연재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만일 창작자에 대한 실제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아니, 실제로 일어나기도 한다.


2016년에는 성우 김자연이 메갈리아의 티셔츠를 착용했다가 게임 클로저스의 성우에서 교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 권력이 개입하지 않았고, 대중의 비판에 대한 반응으로 기업이 성우 교체를 판단했다. 이를 봐도 국가 권력에 의한 검열에서 대중에 의한 검열로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필자는 메갈리아나 워마드의 혐오발언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무해한 메시지의 티셔츠조차 문제 삼아 성우를 교체한 것은 과한 반응이다.


아마도 기안84와 김자연을 함께 논하는 것에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진영논리의 이중잣대를 배제하고 보면, 대중의 반발이 표현의 자유를 필요 이상으로 제한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진영논리의 이중잣대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박해에 대항해 싸우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박해에 가담하는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모든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혐오발언이나 타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표현에 대해서는 일정한 제약이 가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그 기준은 명백해야 하고, 제한의 정도는 최소한이어야 한다. 하물며 단순히 기분을 해친다는 이유만으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에 찬성할 수는 없다.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혹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표현의 자유까지 보장할 것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 역시 볼테르의 명언을 실제로 실행하고 있다고 할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반대하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다면,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22.10.30 추가)


이 글을 쓰고 나서 정권이 바뀐 뒤, 표현의 자유는 훨씬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고등학생이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만평 '윤석열차'가 문제가 되면서, 정부 여당의 인사가 수상 취소가 거론하는 등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평소 "자유주의자"를 자처했던 것을 생각하면 설강화 논란만큼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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