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살, 처음으로 수영을 배워보다
이력서 항목에 취미가 있을 때마다 어떤 그럴듯한 취미를 써내야 하나 항상 고민스러웠다.
분명히 재밌어 보이는 것도 있었고, 즐겁게 했던 것들도 있지만 딱히 꾸준히 취미라고 부를 만한 건 없다고 해야 되나. 회사 이력서라 더 그렇게 느끼는 것도 있지만,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재미의 역치가 높아져버린 2n 살을 자극시키기란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2019년 새해를 맞기 전, 몸이 삐걱대는 게 걱정되기도 하고 꾸준히 할 운동을 찾고 싶었다.
2018년 12월 말, 수영 고급반 경력에 빛나는 어머니께서 머리채를 잡아 구립스포츠센터에 인도해주시기를 어언 10개월이 지났다. (TMI. 여러분 구립체육센터의 수강신청 경쟁률이 얼마나 치열한 지 알고 계셨습니까? 저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한 번 수강신청 놓치고 두 달이나 의도치 않게 쉬었다니까요? 재등록하려고 새벽 5시에 가서 번호표 뽑고 수강신청 오픈 시간 컴퓨터로 대기까지 했습니다? 동년배 마우스 워리어들보다 부지런한 아주머니 파워가 더 무섭다는 것을 실감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수영 8개월 차(수강신청 실패로 2달의 공백을 제외한), 하나의 운동을 이렇게까지 꾸준히 해본 건 정말 처음이다! 운동하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노는 것 같아서 꾸역 몸을 일으켜 나가게 된다. 등딱지를 달고 어린이풀의 물을 다 마시던 하마가 지금은 초보 물개가 되어 오전 7시 수영 초급반의 아주머니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요즘 나의 가장 큰 취미, 수영.
사실 나는 물을 무서워하던 아기 고양이였다면 믿을까?ㅎㅎ (tmi 변명을 해보자면, 제가 뭐 깜찍해서 고양이가 아니고요. 고양이가 물을 싫어한다면서요. (정색) 그래서입니다)
다들 한 번씩 있다는 어린 시절 물에 빠질 뻔한 사건 이후로 나는 물이 무서웠다.
물이 무릎께밖에 오지 않는 얕은 곳에서도 까치발로 돌아다녔다. 조금만 긴장을 하면 물속에 잠긴 발가락과 종아리에 쥐가 났고, 튜브라도 타보라는 친구들의 말에 그마저도 제대로 못 매달려 먼발치에서 구경만 했었다.
"물 위에 사람이 어떻게 뜰 수 있어? 나는 부력을 거스르는 몸무게를 가졌다고!" " 코끼리는 떠도 나는 안 뜬다니까!? 수영 배우려면 수영장만큼의 물을 마셔야 된다며ㅠ 물 먹기도 싫고 귀 먹먹한 것도 무섭고 그냥 다 못하겠어." "어렸을 때 배웠어야 했어... 이번 생은 글렀다고ㅠ 나는 절대 뜰 수 없는 삼류배우 같은 놈이라고..."
수도 없이 외치던 내가
에구머니나, 어느새 이 구역 최고의 수영 영업왕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이 수영하기로 마음먹은 바로 그 다음 날.
수영장으로 떠나기 전 그 순간을 위해 준비했다.
물이 무서운, 다 커버린 쫄보
당신들을 위해 수영 입문 전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나누고 싶어 글을 써본다.
Q. 수업 첫날인데, 어떻게 해야 미어캣 찐따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A: 음, 여러분 말고도 미어캣이 여럿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좀 낯설지 않은 척해보고 싶다면, 준비물과 수영장에 발을 들일 때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준비물: 수영모, 수영복, 물안경, 수건, 속옷, 세면도구, 기초 화장품
이렇게가 제일 기본적인 준비물이 되겠습니다.
센터 첫날 수영장까지: 카운터에 회원카드를 드리고 샤워실 락커 키를 받는다 → 락커 안에 입고 온 옷과 소지품을 넣는다 → 수영복, 수건, 세면도구(바구니), 락커 키를 챙겨 샤워실로 간다 → 수건은 파우치나 지퍼백에 넣어 샤워실 안 캐비닛에 올려둔다 → 가볍게 씻고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 시간이 되면 강사의 삑 소리와 함께 스트레칭 몸 풀기를 한다 → 끝나면 앞쪽으로 가서 수영 선생님 아무나 붙잡고 저 처음 왔습니다 어디로 가면 돼요 물어본다 → 하라는 대로 한다
첫날은 무리하지 마라.. 그냥 내가 물에 뜰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에 감사하길...
아마 열심히 물속/밖에서 다리 읏챠챠 차는 연습만 할 거라서, 다음 날 계단 이런데 오를 때 죽음을 맛볼 것. 근데 근육통도 다음 수영 수업에 가야만 풀리니까 힘들다고 드러눕지 말기~! 약속~!~!
Q. 아침, 점심, 저녁 수영 시간대 조언 좀 해주셔요.
A: 음, 사실 저는 아침반밖에 해보지 않았지만 주워들은 친구들에 말에 따르면 말이죠
아침
: 나는 세상에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많구나를 수영 다니며 새삼 깨달았다. 나는 7시 강습을 듣는데 그러려면 수영장에 6시 45분에는 도착을 해야 된다는 말이다. 나는 수영장이랑 집이랑 가까워서 그래도 6시 반에 나가면 되거든요. 근데 중요한 건 6시 강습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열혈 스위머들도 너무너무 대단한 것.
장점
일찍 일어나기 가능
그냥 떡진 머리 그대로, 자연인 상태로 수영하러 가면 씻고 나오게 되기 때문에 외출 준비 완료
공복 유산소 가능 (개인차가 있겠지만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뺄 생각도 없었는데 다이어트가 되더군요)
물이 깨끗
단점
기상 포기도 용이
아침반이 제일 경쟁률이 치열해서 수강 신청하기 하드코어
머리 말리고 하는 구역에 출근 준비하는 사람이 많아서 내 스킨로션, 드라이기 놓을 공간이 없다
▶ 내가 아침 수영을 택한 이유? 아무래도 현재 아무것도 안하는 취준생 리얼 백수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서 아침 수영을 했다.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할 게 없더라도 규칙적인 아침 일상 하나가 안정적인 바이오리듬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점심
장점
비교적 부담 없는 시간에 갈 수 o
사람이 적다
단점
점심 반이 없는 경우가 많다
백수가 아닌 이상 애매한 시간대
저녁
장점
씻고 집 와서 안 씻어도 됨
피곤해서 기절 각 (근데 잠자기 전 격한 운동이 수면에 드는 걸 오히려 해친다고도 하니...)
친목 모임 활성화
단점
수영하려고 가볍게 저녁 먹어놓고 허기져서 치킨 시킴
집 가서 안 씻어도 된다 양치하고 발 닦으면 잘 준비 끝
과잉 친목으로 때때론 물음표 살인마 아주머니 혹은 아저씨로 인해 귀에서 피가 날 수도
▶ 친구가 저녁 수영을 택한 이유? 회사에서 있었던 스트레스나 이것저것들을 털어 버릴 수 있는 게 가장 좋았다. 열 받은 마음을 PO발차기WER로 와다다 차다 보면 온몸에 진이 빠진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도 괜히 풀리는 기분? 아침 수영도 다녀봤었는데, 수영하고 출근하면 상쾌했던 기분이 금방 고꾸라진다고...ㅠ
이번 여름에는 서피 비치에 가서 서핑도 배웠다. 물론 일어서서 파도를 멋드러지게 쭈욱 타지는 못했지만, 나에겐 바다에서 놀았다는 것 자체가 너무 즐겁고 신기한 일이었다. 어린이 풀에서도 버둥거리던 사람이 바다에 서핑이라니 실화인가요? 이제 바다까지 진출했다고! 대한해협을 횡단할 박조오련이가 될 수 있을 거다 이 말이야.
아직 수영장 레인이나 벽처럼 잡을 게 없으면 무섭고, 코에 물 들어가는 느낌은 싫지만 그래도 올해 잘한 일 TOP 5 안에는 들어가는 결심이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수영장까지 가는 건 매번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지만, 막상 수영하고 나오면 그렇게 개운하고 가뿐할 수가 없다. 입맛도 막 돌고 배고프고 실제로 체력도 되게 늘어난 게 느껴지기도 한다. 수영 처음 배울 때는 25M 레인 한번 왕복하면 헉헉 거리는 숨을 가다듬느라, 계속 뒷사람 먼저 보내곤 했는데 지금은 제일 앞에서 어푸어푸 간답니다. 물론 이렇게 설명해놨지만 아직도 초급반이에요. (코쓱)(민망)
수영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취미를 하나 삼아서 스스로 실력이 나아지는 데서 오는 성취감과 뿌듯함, 이런 것을 같이 느껴봤으면 좋겠다. 원래 뭘 배우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해보고 싶은 게 정말 많은데, 또 이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또한 알기 때문이다.
소소한 성취와 뿌듯함이 각자의 팍팍한 일상 속 에서 새로이 무언가 해볼까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은 힘이 되기를 바란다.
대지에서 고통받는 자들이여 물로 뛰어들라.
나 파이팅! 당신들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