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이 좋다는 것을 언제 스스로 깨달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유년기를 회상했을 때 떠오르는 나의 모습은 언제나 검은색 모나미 플러스펜을 들고 신문 사이에 끼워져 있는 빳빳한 광고지 뒷면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다. 왼손잡이 어린이의 손과 지면이 닿는 부분은 항상 까맣게 잉크로 물들어 있고.
고등학생이 되어, 미대 입시를 희망하고 준비하기 전까지 나는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인가 한 번, 방문미술교육을 받아보았지만 명암 넣는 법이나 물감 쓰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나는 플러스펜을 이용해 마음대로 종이에 만화 끄적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하교 후 만화를 그리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온전히 행복한, 나만의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론이 잘 탑재되지 않는 머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이런 성향 덕에 입시미술은 지옥같이 재미없는 시간이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다소 늦게 받아서인지 나는 처음 그림을 그릴 때의 습관을 지금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스케치, 다시 말해 밑그림을 전혀 그리지 않는다. 어떤 그림을 그리든 나는 맨 종이에 펜을 대고 그림을 그린다. 스치듯 떠오르는 생각을 손에 맡길 뿐, 세세한 계획은 없다. 결과를 예측하지 않고 생각이 이끄는 대로 손을 움직이면 항상 당초 예상한 것과는 다른 그림이 완성된다. 계획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도무지 참을 수 없겠지만, 나는 썩 싫지 않다. 오히려 좋다. 계획하지 않았기에 탄생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림. 하지만 이렇게 나의 성향을 인정하고 좋아하게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던 어린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밑그림을 먼저 그려야지', '명암은 천천히 쌓아 올려야지' 등의 말들에 '내 방법이 틀렸나?'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림에 옳고 그름은 없는데, 당시에는 타인이 내리는 판단에 이미 만들어진 기준에 나도 모르게 갇혔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나만이 가진 색깔은 점점 흐려졌고, 나를 위한 것도, 남을 위한 것도 아닌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30대를 맞이하고서야,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도, 일을 할 때에도, 보고서를 만들 때에도, 글을 쓸 때도... 나아가 내 삶을 대할 때도 밑그림 없이 시작부터 한다.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 계획성 없는 태도로 비추어질 수 있다. 세밀한 계획을 하지 않는다는 점엔 동의하지만 그것이 구상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마다 구상하는 방식과 순서, 시간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짧게 구상하고 시작하고 큰 틀을 잡은 후 서서히 고쳐나가려 한다.
얼마 전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 : 너는 노후에 어떤 일을 할 건지 생각해보았니?
나 : 아니요. 그때의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겠죠.
아빠 : ... (할 말을 잃으심)
세상은 계획을 중요하게 여긴다. 때로는 '꿈'이라는 형체 없는 구름에 계획성과 체계성이라는 평가 기준을 집어 넣고 개인을 판단하는 요소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너는 나중에 어떤 대학에 가고 싶니, 어떤 회사에 들어가고 싶니,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니, 아이는 몇 명을 낳고 싶니, 퇴직 후엔 무엇을 하고 싶니. 또, 이제 결혼해야지, 결혼했으니 가족계획을 해야지, 취직했으니 승진해야지. 이직 계획은 세웠니?... 이런 질문을 받고 당장 대답하지 못한다면, '너는 꿈도 목표도 없니?' 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나는 위의 전형적인 질문들 중 그 어떤 것도 계획해본 적이 없다. 계획이 없었으니 이후 결과에 따라 성공과 실패 여부를 가를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정말 행복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삶'이 나에게 주어졌지만, 삶을 내 마음과 의지대로 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도 아니라고. 지금 만족할 만한 지위와 명예를 갖고 있는 자와 만족하지 못할 상황에 처해있는 자 모두 삶이라는 동등한 길목에서 함께 걷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현재에 충실하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렇게 밑그림이 없어도 하루를 충실하고 후회 없이 살아가면 그에 맞는 길이 하루하루 생겨날 것이라 믿는다.
우리 모두에게 삶은 딱 한 번씩 주어졌다.
윤회설이나 여타 종교적 의미에서의 삶을 잠시 떼어놓고 삶을 바라보자면 말이다. 시간이란 요소를 기준으로 우리 모두의 삶을 공중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끝없이 긴 하나의 선상에 일렬로 서있을 것 같다. 초인적 능력이 있지 않은 이상 그 누구도 우리보다 앞선 미래를 살 수 없다. 나보다 오래 살아온 손윗사람이라고 해서 나의 미래를 점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손윗사람의 연륜과 경험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오롯이 개인의 삶의 방식이고 타인에게 정답이 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1분 1초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졌고 동일하게 흐르고 있다. 동일한 시간 내에서 우린 다른 환경, 경험, 변수를 맞이하며 살아간다. 삶의 방식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못 사는 것인지 누가 감히 우열을 정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의 삶의 방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 방식이 범법행위가 아닌 한 말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나 스스로가 내 삶의 방식에 대해 돌아보고 존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말인즉슨, 타인의 성향이나 삶의 방식을 보고 불안해하며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요즘 자기 계발서와 심리학 서적이 유행하고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은 인간의 특성 덕이다. 나도 한두권 읽어보았다. 우습게도, 나는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기보다, 나에게 필요한 말을 찾아 골라 읽고 있었다. 마치 '답정너'처럼.
결국 답은 나 자신이 가지고 있다.
그 아무도 나의 삶에 대해 우수하고 열등하다 이야기할 권리는 없다. 나는 나에게 맞는 신발을 신고 걸어야 한다. 그 신발은 내가 여러 번 신어서 나에게 온전히 맞게 만들어야 한다. 얼마 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공의 요소'가 무엇이라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성공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행복이라고 대답했다.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행복하다 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이미 성공한 것 아닐까? 적어도 내 기준은 그렇다.
수채화로 모작 하는 것보다 낙서와 만화그리기를 더 좋아했던 어린이는 그 때 이미 자아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인 것을.
나는 앞으로도 내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 밑그림 없이 시작하는 삶을 살아갈 것 같다.
그게 나고, 그게 내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