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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소리

자신을 듣는 방법

by 닥터브룩스

내면의 소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한 번 던지고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면의 소리가 있다면, 과연 외면의 소리 또한 존재하는가? 어느 날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며, 나는 이 질문들에 사로잡혔다. 명상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과정이라 했지만, 그 소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들을 수 있는지, 그리고 왜 중요한지에 대한 궁금증이 몇 날 며칠 내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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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ummi.aiⓒAshok Sangireddy


그래서 나는 내면의 소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과연 내면의 소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혼잣말, 즉 자신과 나누는 조용한 대화인가? 아니면 벽을 마주하고 홀로 중얼거리는 소리, 아무도 듣지 않는 공간에서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인가? 혹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생각의 메아리, 말로 형언되지 않은 감정의 잔재물인가?


내면의 소리는 때로는 명확한 문장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형체 없는 감정의 파동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자신과 마주할 때 비로소 들리는, 가장 진실한 마음의 울림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면의 소리를 상상해 본다. 새벽녘, 고요한 방 안에서 창문 너머로 들리는 어둠의 바람 소리와 함께 자신의 숨소리를 느끼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내면의 소리가 우리에게 던지는 신호일 것이다. 그것은 때로 불편하고, 때로 따뜻하며, 때로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 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내면의 소리는 우리의 내면에 잠재된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외부의 기대나 소음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중심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면의 소리가 있다면, 외면의 소리 또한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외면의 소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웃음, 혹은 다툼의 소리인가? 아니면 거리에서 들리는 자동차 경적,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혹은 시장의 활기찬 외침인가?


외면의 소리는 우리가 세상과 연결하게 해주는 감각의 통로가 아닐까. 우리의 말과 행동, 몸짓과 표정으로 드러나는 모든 표현,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 표현되고 그리고 다시 되돌아오는 타인의 감각적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감정의 교류를 느낄지도 모른다. 친구와의 가벼운 수다, 직장에서의 진지한 토론, 낯선 이와의 짧은 인사까지, 외면의 소리는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감각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외면의 소리는 항상 고요하거나 은밀하지만은 않다. 때로는 시끄럽고, 혼란스럽기까지 한다. 세상의 소음이 우리의 귀를 가득 채우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에 쉽게 방해받는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말, 사회의 기대,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 압도당하고 있다. 이런 소음들 속에서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잃어버린다면, 자신만의 방향을 잃고 방황할 수 있다. 그래서 내면과 외면의 소리를 조화롭게 듣는 일이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된다. 외면의 소리가 세상과의 연결이라면, 내면의 소리는 그 연결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나침반이 아닐까.


명상에 대해 생각하며, 나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이 단순히 고요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느꼈다. 최진석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언급된 기성자의 나무 닭처럼, 명상은 태연자약한 자세를 통해 세상의 소란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을 길러준다. 이는 단순히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만의 중심을 찾고, 나다움을 지키며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명상은 우리가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 그리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마주할 수 있다.


명상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부좌를 틀고 손을 모으는 전통적인 방식일 수도 있고, 조용한 산책길에서 바람을 느끼며 생각에 잠기는 순간일 수도 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혹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자기만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순간들은 우리의 마음을 고요히 하고, 내면의 소리가 들릴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명상이 모두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명상의 고요함 속에서 오히려 불안함을 느낄 수 있고, 누군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 명상을 위한 시간을 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내면의 소리를 듣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상 속에서 실천 가능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기록이다. 일기를 쓰는 것은 내면의 소리를 정리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강력한 방법이다. 펜을 들고 하얀 종이에 자신의 생각을 써 내려가는 행위나 노트북을 열고 일정한 간격의 타건음은 마음속 혼란을 정리하고, 내면의 소리를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줄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기는 매일의 기록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부담스러울 수 있다. “매일 써야 한다”는 압박감은 오히려 진실한 자신과의 대화를 방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일기를 꼭 매일 쓰지 않아도 된다. 힘든 하루를 보낸 뒤 자신의 감정을 적거나, 기쁜 순간을 기록하며 그 이유를 곱씹어보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혹은 특별한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글쓰기 숙제가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음성 일기도 괜찮은 대안이다. 자신의 목소리로 생각을 녹음하며 내면의 소리를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 짧은 음성을 남기며 그날의 기분이나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마치 친구와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자신을 마주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낯설어하거나 어색하게 느끼는 이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AI 챗봇과 대화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다.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되돌아보는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다.


인생은 빠르게 흘러간다. 하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일주일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어느새 주말이 다가오고, 한 달이 지나면 계절이 바뀐다. 옷을 갈아입고, 늘어나는 흰머리와 주름살을 마주하며 우리는 시간의 무게를 느낀다. 십 년이라는 세월은 그렇게 덧없이 우리 곁을 스쳐간다. 누군가는 말했다. “인생의 속도는 나이와 같다”라고. 반복되는 일상은 시간을 더욱 빠르게 느끼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 회사나 학교로 향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잠드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을 잃고 만다. 그래서일까, 찰나의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순간을 간직하려는 노력이 더욱더 절실해진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은 바로 그 찰나를 붙잡는 첫걸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우리는 자신에게 진중해질 수 있다. 이 질문들은 비록 상투적일지라도, 우리의 존재를 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은 거창한 준비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고요한 명상실, 특별한 도구, 혹은 완벽한 환경이 없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귀 기울이려는 마음과 노력이다. 길을 걷다가, 버스나 전철 창밖을 바라보며, 혹은 잠들기 전 조용한 시간에 자신에게 물어보자. "오늘은 나에게 어떤 의미의 하루였는가", “나는 그 순간 무엇을 느꼈는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이 작은 질문들이 내면의 소리를 듣는 문을 열게 해 줄 것이다. 때로는 답이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소리를 듣는 여정의 시작일 것이다.

지금,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그 여정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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