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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레드넛 Jun 06. 2023

당신의 글이 망하는 이유, 두 번째

설계는 공사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글을 업으로 살다가 떠올린 글에 돌아온 생각지도 못한 호의적인 반응을 보며,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글쟁이에게, 글을 썼을 때 좋은 반응이 돌아오는 것은 다음 글을 위한 훌륭한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엉겁결에-사실 애초에 일종의 시리즈처럼 떠오르는 것들을 정리해 볼 생각이었으니까, 엉겁결이라고는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글로 시리즈를 이어가 볼까 한다. 내가 생각하는, 어떻게 하면 글이 망하는 길로 접어드는지에 대한 시리즈의 두 번째 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글을 굉장히 빨리 쓰는 편이다. 내가 글을 쓰는 시간 중 가장 많이 할애하는 시간은 사실 글 자체를 쓰는 시간보다는, 그 글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비율로 따지자면, 전자는 10점 중 2점 정도, 후자가 10점 중 8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며 "글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써?"라고 묻곤 한다. 이 글은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아기돼지 3형제의 이야기를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첫째와 둘째는 각각 지푸라기와 나무로 얼기설기 집을 지었고, 늑대의 입김과 박치기 한 방으로 각각 집이 고꾸라져 잡아먹힐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가 피신한 셋째의 집은 탄탄한 설계 아래 튼튼한 벽돌로 쌓아 올린 집이었고, 늑대의 무엇으로도 그 집을 깰 수 없었다. 그렇게 3형제는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글 역시 마찬가지다. 글의 시작은 누가 내 글의 독자가 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할 때 첫걸음은 어디가 될 것인가? 


물론 당연하게도, 수많은 정답들이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작가가 같은 방법론을 영위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가 제시하고 싶은 정답은, 글의 구조를 탄탄히 설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수없이 기-승-전-결이라는 단어를 배워 왔다. 교과서에 적혀 있는 이야기라고 해서 고리타분하고 무의미하며 현실에서는 효용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이번만큼은 당신이 틀렸다. 기-승-전-결은 굳건한 글의 기반이 되는 기초적인 구조다.


그렇다면 좋은 기승전결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한번 일반적인 논설문을 쓴다고 가정하고서, 설계를 해 보도록 하자. 


주제는,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중 어느 것을 향해 가야 하는가?로 잡을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보편적 복지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글을 잡아보고자 한다. 정치 성향과는 무관하다.




기, 글의 다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예 인트로에 적절한 일화를 박아 넣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이야기를 통해 글의 흥미를 돋우는 거니까. 적절하게 들어맞는 일화가 없다면, 현상을 명징하게 직조해 건조하게 만들어 내가 할 주장의 근거로 마련하기도 한다. 선호와는 별개로, 후자의 스타일이 내 글투에 더 잘 부합한다. 


나보고 지금 글을 쓰라고 한다면,  언론을 통해 보도된 복지 사각지대의 현실을 논할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나는 현재의 우리 복지 시스템이 얼마나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지를 써낼 것이다. 혹은, 국가통계포털이라는 좋은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통계 자료를 인용할 것이다. 논지의 시작은 무엇보다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어야 하니까.


승, 글의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은 제 논리를 전개하는 기반이 없이는 든든히 설 수 없다. 다리에서 뻗어나간 힘은 허리를 통해 상체로 전달된다. 그렇기 때문에, 승에 해당하는 부분은 그 무엇보다 제 논리를 탄탄하게 만들 근거가 되어야 한다. 


나에게 승을 쓰라고 한다면,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 사이의 주요 쟁점들을 논할 것이다. 지금까지 논쟁의 근간이 된 데이터와 보도는 넘쳐난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여기서 훌륭한 데이터를 선별하여 가공하는 것이다. 선별적 복지에 대해 제기되는 선별 비용의 문제, 보편적 복지에 대해 제기되는 근로의욕 감퇴 등 다양한 논쟁점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왜 보편적 복지인지를 논하기 시작할 것이다.


전, 글의 절정이 되는 부분이다. 나는 전이야말로 글의 꽃이고,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전에서는 기와 승으로 단단히 쌓아 올린 기반 위에 자신의 논지를 화려하게 꽃 피워야 한다. 


내가 쓰는 전은 선별적 복지로 인한 심리적 박탈감, 그리고 선별 비용의 문제를 강력히 제기할 것이다. 또한, 현재 한국의 노인 빈곤율과 비자발적 실업률의 폭증을 다루며 현행 제도의 선별성이 이러한 문제를 불렀노라고 비판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편적 복지에 대해 제기된 근로의욕 감퇴 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게, 내 글 속에서 보편적 복지는 완전한 대안이자 유토피아가 된다.


결, 모든 것의 마무리다. 결어가 되는 이 부분에서, 글은 마무리가 지어져야 한다. 결은 간결하게, 기-승-전에서 논의한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담아야 한다. 어떤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지 결론이 미흡하다면, 글의 설득력은 사라진다. 단호하고 깔끔하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순간이다. 내가 쓴 가상의 논설에서, 결은 보편적 복지의 전면 도입과 그를 통해 변화할 사회의 양상을 논하고 있을 것이다.





주의할 점. 기-승-전-결이라는 구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기-승-전-결은 아주 보편적이고 효율적인 도구다. 하지만 여기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위에서 말한 구조대로 글을 쓰려고 발버둥 칠 필요도 없다. 글의 설계도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고, 활용하기에 따라 그 형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기-승-전-결은 기초적인 구조일 뿐이다.


두괄식이 더 효용이 좋은지, 미괄식이 더 효용이 좋은지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쓰며 느낀 점은, 글에 따라서 두괄식도 미괄식도 각각 효용이 다른데 그걸 단호하게 분류할 수는 없다는 거였다. 그런 형식에 얽매이는 순간, 좋은 글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글은, 자기 확신에 따른 설계가 있다면 그 설계를 바탕으로 쌓아 올리는 물건이다. 공산품이 아닌, 각자 하나하나가 또렷한 개성을 바탕으로 쓰이는 물건이다. 내가 제시한 것은,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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