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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거북이 Feb 27. 2020

우리 모두 코로나19의 생존자이다.

지금 서로를 비난하기보다 격려하고 위로를 해야할 때

"엄마, 실화가 뭐예요?"

"실화? 실화는 진짜 이야기라는 거지."

"지금 우리 실화인 거예요? 지금 진짜인 거죠? 난 지금 꿈인 것 같아요."

"왜? 코로나 때문에?"

"네. 코로나 때문에 진짜 아니고 꿈같아요."


오늘 저녁 아들과 나눈 대화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학교도 휴교하고 학원도 휴원을 했다. 나도 일을 2주간 쉬기로 했다. 식료품을 사러 마트를 가는 것, 잠깐 마스크를 쓰고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는 것 외에는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다. 아들의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약속도 다 취소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가족들과 집안에서만 지내는 생활을 3일째 하고 있다.

세상과 단절되어 격리된 고립된 삶.

오로지 세상과의 소통은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창 너머 보이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뿐.


이런 제한된 삶은 누구나 답답하고 무료하며 힘들다. 게다가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불안을 안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도 크다. 하지만 '진짜가 아니고 꿈같다.'는 아들의 말에 나는 너무 놀랐다. 왜냐하면, 지금이 현실이 아니고 마치 꿈속 같다는 느낌이 드는 '비현실감'은 소위 '해리'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해리는 실제 상황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억과 감정을 자아와 완전히 단절시키는 것이다. 해리의 가장 극심한 유형 중 하나는 TV 드라마 소재에서 자주 나오는 '기억상실'일 것이다. 해리는 매우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에 위협을 느낄 때 쉽게 나타나는 방어기제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전쟁이나 성폭력, 죽음의 위기,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는 등 강한 트라우마 사건을 겪을 때 인간이 심리적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방어기제가 바로 해리이다.


즉, 지금의 현실을 나라는 '자아'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상태일 때, 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과 고통스러운 감정을 내 안에서 완전히 분리를 시켜버린다. 나라는 자아를 구성하는 다양한 경험이 있는데, 그중 한 경험이 내 안에 통합되기엔 너무 괴롭고 이질적이기 때문에, 칼로 당근을 두 동강으로 잘라서 쓸모없는 한 부분을 옆으로 밀어 놓듯이, 그렇게 지금 괴로운 경험을 내 안에 담지 않고 선으로 싹 그어 자아 밖으로 밀어버린다. 그래서 그 경험이 내 안에서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 아들은 어쩌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약하게나마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들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해리는 아니지만 불안과 분노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안과 분노를 특정 대상에 투사하여 인터넷 댓글로 온갖 욕과 비난을 하는 식으로 공격성을 표출할 수도 있다. 혹은 그 불안과 분노를 자기 안으로 돌려서 우울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무너져버렸다. 정말 평범하게 외출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열심히 일하고, 내가 원하는 활동을 자유롭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상. 이 일상이 너무나 먼 옛날이 되었다. 코로나 감염으로 인해 생명에 지장이 생길까 걱정이 되는 것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인 자유의지가 철저히 제약당하면서 영혼의 손상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지금은 감염자의 회복과 방역당국, 의료진의 노고에 힘을 실어주고 격려를 해주어 최대한의 감염을 막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각종 지출, 보상, 벌금, 세금 등등 온갖 경제적 문제들이 뒤따라 올 것이다. 동시에 꼭 우리 모두 코로나로 인한 마음의 후유증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코로나의 생존자이다.  모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 시간에 비난하고 욕하며 서로에게 상처가 주는 말을 하는 대신 서로를 격려해주자. 힘들지만 서로 애쓰고 있고 잘하고 있다고 위로해주자. 그리고 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시간을 거쳐,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일상의 평범함에 깊이 감사하면서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서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하고 공감하며 또 위로해주자. 격려해주자.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트라우마의 치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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