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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Apr 02. 2021

저는 먼저 먹으면 안 돼요?

제가 암 수술 한 번 더 하면 되겠어요?


“맛있게 잘 돼 가구나. 정서방은 언제 도착한다노?”

전복죽을 젓고 있는 내 옆을 서성이며 어머니는 벌써 몇 번째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우리 저녁 먼저 먹을 거예요. 아직 두어 시간 더 있어야 도착한대요.”


어머니는 바다 쪽을 내다보며 서성였다. 싱싱한 전복이 듬뿍 들어간, 쌀 반 전복 반 죽이 끓고 있었다. 나는 자꾸 어머니 쪽으로 눈이 갔다. 나와 딸이 팔순 노모와 동해안 친구네 펜션에서 보내는 둘째 날이었다. 암 수술 후 3년 만의 첫 가족여행이었다. 모녀 3대는 8월 말의 해변을 걷고 사방공원에 드러눕기도 하며 휴가를 즐겼다. 남편과 막내아들이 합류하면 1박을 더 할 것이었다.


“어지간히 안 늦으면 정서방 오면 저녁 같이 먹자.”

마음이 안 놓이는지 어머니는 계속 정서방을 기다렸다. 9시가 넘을지도 모른다 했건만 자꾸 묻는 것이었다. 나는 웃어넘겼다. “아따, 사위 생각하는 장모 사랑 보소~.”


이 동해 바닷가 펜션으로 우리 가족을 초대한 건 고향 친구 순남이었다. 어제 터미널에서 차를 태워다 준 것도, 식재료를 날라 온 것도 친구였다. 친정어머니, 막내 입대, 고향 친구까지. 내겐 한 번에 여러 의미를 담은 간만의 여행이었다. 이제 저녁 먹고 느긋하게 쉴 시간이었다.


“죽 따로 퍼놨나?”

전복죽이 차려졌을 때 어머니가 물었다.

저녁에 오면 퍼 줄 거라고,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퍼서 냉장고에 넣어 두라고 다시 말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야가 우예 이래 말귀를 못 알아듣노. 남편 밥 먼저 퍼 놓는 게 뭐 그래 힘드노. 여자들이 좋은 거 먼저 먹고 남편하고 아들한테는 찌끄레기를 준다 말이가?”

어머니의 18번, ‘남자 먼저’였다. 내 맘이 싸해지니 표정관리도 쉽지 않았다.

“아랫목에 밥그릇 묻어 두던 시절 얘기네요. 차근차근 퍼먹는데 무슨 찌꺼기가 있고…….”

침묵 사이에 어색한 몇 마디가 오가며 죽 그릇들이 비워졌다.


“보자 보자 하니, 니는 우째 그래 못되게 변해 가노. 내가 그렇게 가르치더나. 니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찌끄레기 주면, 그 남자가 잘 되겠나? 그리고, 어미가 딸은 제대로 가르쳐야지.”

대학 졸업반 손녀딸을 의식한 듯 어머니 목소리엔 위엄까지 더해졌다. 나도 질 수 없었다.

“어머니, 그만하세요. 도대체 죽 가지고 뭐 하자는 거예요?”

“야가 누가 할 소릴 하노. 남편한테 잘하라는 소리가 뭐가 그렇게 못할 소리고.”

더 받아치면 더 시끄러워질 것이다. 나는 속을 꾹꾹 누르듯 딸에게 눈으로 말했다.

‘할머니 엽기지? 이해해라.’ 딸이 눈빛으로 화답했다. ‘할머니 저 정도였어?' 


"어머니, 전복죽을 내가 먼저 퍼먹고 남편 아들한테 찌꺼기 줬다 칩시다. 좋아요. 저는 좀 먼저 먹으면 안 돼요? 예, 어머닌 귀가 닳도록 가르쳤죠. 아들 먼저. 남자 먼저. 시댁에 잘해라, 남편한테 잘해라. 이젠 손녀딸한테도 그거 가르치려고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50대 딸년이 80대 친정엄마한테 대들고 있었다. 늦되 먹은 사춘기인가. 암수술 탓인가, 갱년기 때문인가. 나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난번 주왕산 갔을 때도 꼭 이랬잖아요. 입만 열면 정서방한테 잘해라. 내가 얼마나 더 잘해야 되냐고, 약점 잡혔어요? 그만하라 그랬잖아요. 정서방한테 각시한테 잘하라 좀 하시라고요.”

“됐다 마. 사람이 변해도 우째 그래 못되게 변하노. 죽을라꼬 천성이 변하능갑다.”

목소리에 날이 섰다. 설거지를 하며 딸은 힐끗 할머니와 엄마를 보는 거 같았다.

“니는 니 에미 본받지 마래이. 사람이 저러모 못 쓴다.”

나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봇물 터지듯 내 입에서 말이 쏟아졌다.


“아니, 어머니, 그만하시라고요. 제가 암 수술 한 번 더 하면 되겠어요? 소름이 돋는다고요오빠 암 투병할 때도 오빠 보고 올케한테 잘하라 그랬어요 정서방한테 잘해라말 안 되는 거 알아요? 사위 오면 물어봐요. 남편 무시하고 좋은 거 먼저 먹고 그렇게 살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네요. 사위한테 아픈 딸한테 더 잘하라그래야 맞는 거 아닌가요? 더 이상 뭘 어떻게 잘하란 말이냐고요…….


어머니는 바다를 바라보고 벽에 한 팔을 기댔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숨을 쉬다가 어머니는 조용히 이부자리를 폈다. 굳은 얼굴이 등을 돌리고 누웠다. 창밖엔 동해 바다가 더 짙은 색으로 출렁이며 저물고 있었다. 아, 어머니의 뒷모습. 어릴 적부터 내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아버지와 다투고 마음이 상하면 저렇게 드러누웠지. 어린 나는 어머니가 안쓰러웠고 어머니의 심기를 살폈지.


나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딸과 함께 펜션을 나와 버렸다. 어떻게 저 벽을 넘을까. 딸자식한테 하고 싶은 말이 저것뿐일까. 암 수술 후 3년, 점점 건강하고 강해지는 딸이 두려운 걸까? 나는 딸과 함께 바닷바람을 맞으며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곤 바다를 향해 우리는 소리를 꽥꽥 내질렀다.

“야~~~ &%*&$#~~~ 이게 뭐냐고~~~~”

소리 지르며 웃다가 또 소리 지르다가 딸과 함께 걸었다. 짝꿍이 전화 왔길래 내가 말했다.

“나는 확실히 미친년이 되었나 봐. 내가 어머니한테 이렇게 큰소리로 대들 줄은 몰랐어. 어머닌 혼자 드러누웠고 우린 나왔어. 늦는 거 부담 갖지 말고 천천히 와.”


늦은 시간 사위와 손자가 왔을 때 어머니는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막내의 군 입대 인사도 살갑지 않게 받았다. 그랬다. 나는 이젠 더 이상 어머니 눈치 보고 비위 맞추는 소녀가 아니었다. ‘불쌍한 노인네’를 볼수록 나는 화가 났다. 착한 딸이었는데, 나도 모르겠다. 내 안의 무엇이 이토록 미쳐 날뛰는지. 


가족여행 분위기는 완전 '전복죽'이 돼 버렸다.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을 맞았다. 가장 먼저 일어난 어머니, 굳은 얼굴로 집에 가겠다며 서둘렀다. 친구네 식당에서 점심 먹기로 한 계획도 어머니 안중엔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 터미널로 차를 몰아 배웅해 드렸다. 온 가족이 포옹으로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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