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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y 21. 2024

네 속을 도무지 모르겠어!

전원일기 김회장과 같은 가부장의 권위에 젖어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엄마가 주간보호센터에서 돌아오면 내가 하는 일이 있다. 무한 반복으로 돌아가는 프로 ‘한국인의 밥상’을 켜 드리는 일이다. 도시 생활에 갇혀 무료할까 봐 내가 골라 드린 프로다. 10년쯤 전부터 청각 장애가 있는 노모는 보청기를 싫어해 버린 지 오래, 듣지 못하고 내용도 따라갈 수 없으니 방송 프로에 흥미도 없었다. 딱 하나 예외가 있었으니 ‘한국인의 밥상’이었다.      


우선 엄마한테는 너무나 익숙한 그림이 나오니 좋아했다. 억지로 들으려 애쓸 필요 없으니 아무리 봐도 싫증 내는 법이 없다. 진행과 내레이션을 하는 최불암을 엄마는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회장님으로 오래 아는 사람처럼 좋아한다. 전국 곳곳을 다니며 산과 들과 강과 바다에서 나는 식재료로 요리해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먹는 풍경. 엄마에게 가장 익숙한 삶이자 향수다. 단순한 엄마에게 딱 맞는 프로그램이다.   


        

속마음을 말하지 않고 묻지 않는 밀양 엄마     


“아이고 우리 막내딸 잘 있나?” 승종이 성준이도 잘 있고?”

“그래, 몸 관리 잘하거래이.”      


엄마가 창원에 사는 여동생과 나누는 전화 통화는 이렇게 시작하고 끝난다. 여동생뿐만 아니라 누나들이나 남동생과의 통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설이나 추석이나 생일 등 어쩌다 한 번씩 통화하는 손자 손녀들과의 통화도 매한가지다. 주말에 만나는 숙과도 포옹하고 나면 안부 묻고 건강 잘 챙기라는 게 전부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 기억난다. 엄마가 안산 우리 집에 다니러 왔을 때 숙이 시엄마에 관한 글을 쓰려고 작정하고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숙이 당신의 시부모와 남편과 자녀들과 관련된 질문을 쏟아내도 엄마는 길게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건질 게 별로 없으니 숙은 “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거듭 물으며 엄마가 속얘기 하기까지 시간을 들여야 했다.       


열여덟에 시집왔을 때 엄마는 가장 좋은 게 자기 방이 생긴 것이라 했다. 열 살도 안 되어 엄마를 잃은, 새엄마가 있는 가난한 외가의 막내딸은 당당하게 자기 주장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학교도 공부도 자기 방도 꿈꿀 수 없었다. 일정한 잠자리도 없이 어느 날은 마루에서 어느 날은 오빠 부부의 방에 자며 일만 하는 아이였다.     

 

외가에서 서열이 꼴찌였던 엄마는 장남인 우리 아빠에게 시집와서 맏며느리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그래봤자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들 건사하고 논밭 일과 집안일 잘해서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았다. 결코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일만 하는 삶이었다. 엄마가 예순일곱 되던 해 아빠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부모도 남편도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엄마는 변하지 않았다. 아프기 전까지 일만 했지 자기 속마음을 털어 수다 떠는 법이 없었다.    


       

속마음을 말하고 질문하는 영덕 엄마

     

밀양 엄마와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영덕 엄마는 참 많이 달랐다. 무슨 생각을 하고 뭘 느끼는지 말하는 분이었다. 사위인 나하고 전화로도 온갖 걸 묻고 답하길 즐겼다. 이 글을 쓰다가 전화했을 때도 그랬다.  

      

“아이고, 정서방 이른 아침에 어쩐 일로?”

“글을 하나 쓰고 있는데, 어머니 생각이 나서 말이죠.”

“무슨 글인데?”

“어머니랑은 온갖 얘기 재미있게 나눌 수 있는데, 밀양 엄마는 그런 분이 아니잖아요? 그런 주제예요."

“그래?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나. 그래, 사돈은 잘 계시고?”…      


이렇게 시작한 통화는 10분도 더 지나 끝났다. 밀양 엄마의 통화는 1, 2분이면 족한데 영덕 엄마와의 통화는 길면 30분도 넘어간다. “내가 사위한테 이런 말 하는 게 부끄러운데” 하면서도 당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다. 나는 들어드리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하게 됐다. 장모와 사위의 형식적인 관계를 넘어 나는 재미있게 인생 공부를 하게 됐다.     


영덕 엄마는 자기 목소리를 내며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이었다. 교회 권사라서 목사 사위가 부담스러울 수 있을 텐데, 내 앞에서도 장인어른과 다투기도 했다. 처음엔 솔직히 좀 낯설고 불편했지만 지금은 내 생각이 좀 달라졌다. 남편이 세상 떠날 때까지 그를 이기진 못했을지언정 엄마는 대화를 하고 소통하고 싶었던 거다. 밖으로 도는 남편을 대신하여 다섯 자식을 키우면서도 당신 속을 자식들과 나누려 애쓰며 살았다.           



네 속을 알고 싶다고!     


같은 노인인데 밀양 엄마와 영덕 엄마는 왜 이렇게나 다를까? 성격과 환경 차이도 있겠지만, 밀양 엄마의 삶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우리집에서 큰소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엄마가 자기감정에 솔직할 기회도 없고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이젠 귀도 안 들리니 엄마는 듣지도 묻지도 않고 하던 대로 살 뿐이다.  

      

언젠가 어떤 프로에서 누군가가 최불암에게 물었다. 요즘 한국인의 밥상 말고 드라마에는 왜 출연하지 않냐고. 그는 전원일기 회장 같은 그런 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은데 그런 게 없단다. 나도 우리 아이들 어릴 때 옛날 방송을 찾아 보여줄 정도로 좋아하던 프로다. 그러나 내가 페미니즘을 한 뒤로는 전원일기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게 힘들어졌다. 남녀 위계질서 속에 돌아가는 화면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해서 말이다.    

  

그 엄마의 그 아들이랄까. “네 속을 도무지 모르겠어! 네 마음을 알고 싶어!” 살면서 숙한테 참 많이 들은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당황했다.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지금도 나는 내 속마음을 말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 듣기를 어려워한다. 왜 그럴까? 나라고 알고 싶지 않겠나. 감정을 나누는 걸 부끄러운 짓인양 잘못 배워서겠다. 그리고 내가 아직도 전원일기 김회장과 같은 가부장의 권위에 젖어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 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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