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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Jun 11. 2024

여성의 자기돌봄은 정치적인 행위

나는 과연 시엄마와 얼마나 다른 노년을 살 수 있을까?

내가 참 좋아하는 사진 한 장을 썸네일로 쓴다. 에리카 캠퍼스 호숫가에서 2년 전 이맘 때 시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벤치에 앉아 손뼉 치며 노래하는 시엄마와 그 앞에서 스카프 한 장 손에 휘날리며 춤을 추는 내가 보인다. 사진에 포착된 동작을 보면 아주 그냥 내 춤사위가 장난 아니다. 시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퇴원해서 큰아들네인 우리집에서 돌봄 받던 첫 해였다. 휠체어가 그때 상황을 잘 보여준다. 


볼수록 미소 짓게 되는 사진이다. 평화롭고도 행복한 시엄마와 며느리 관계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노래 좋아하는 시엄마와 춤 좋아하는 큰며느리가 날마다 이렇게 살았냐고? 그럴 리가! 그런 인생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리. 지리멸렬한 일상 중에 찰나 같은 하루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병들고 돌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 땅에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익숙한 그림을 지우고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사진이다. 


춤추는 며느리와 노래하는 시엄마, 알고 보면 정치적인 장면이다. 아니, 정치적으로 '깨어난' 내가 있다. 지난 10년간 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로 살았다. 그동안 익숙한 '좋은' 여자 말고 내 목소리로 말하는 인간이 있었다. 지난 2년간 시엄마 돌봄 당번 3개월마다 글쓰고 활동하는 내 삶의 우선순위는 변할 수 없었다. 내가 나를 잘 돌보는 자기돌봄이 있었기에 새로운 고부관계도 있었다. 치열한 정치였다. 



자기돌봄


사진을 새삼 보게 된 건 7월에 할 강의 준비 때문이었다. 여성 돌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자기돌봄과 치유'라는 주제로 요청받았다. 책《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의 저자로서 초대받은 스물한 번째 외부 강의다. 낯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늘 긴장되는 만큼 준비부터 마음과 시간이 드는 일이다. 강의 자료를 검토하며 사진을 보며 내가 참 이 일을 좋아하고 즐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가부장 사회에서 내게 마이크를 주고 말하라는데 어찌 신나지 않겠는가. 더구나 자기를 희생하라거나 자기를 부인하라는 요청이 아니라 자기돌봄을 이야기해 달라지 않나.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 이런 자기돌봄은 당연한 소리 같으나 누구나 누리는 복은 아닌지도 모른다. 몸이 아파도 티를 못 내거나 맘 편히 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내 몸의 소리는 무시하고 다른 몸의 요구에 먼저 반응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를 쓰기 전엔 나도 내 몸의 소리를 무시하고 살았다. 한 번도 내 몸의 주인이 된 적이 없으니 내 몸을 우선하는 게 어떤 건지도 몰랐다. 의사나 다른 누군가가 내 몸을 과연 책임질 수 있을까? 내 몸을 누구에게 맡기는가? 그 질문이 나를 깨웠다. 내가 내 몸의 의사다, 내가 책임진다, 나를 먼저 돌본다, 그건 혁명 같은 깨달음이었다. 내 목소리를 죽이려는 모든 외부적인 힘에 저항하는 출발이었다. 


자기돌봄을 나만 살자는 이기적인 태도로 오해하면 안 된다. 내 몸먼저 돌보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건 몸이었다. 자기돌봄은 내 자유의지와 내 몸이 하나로 살게 했다. 내 몸이 살고 내 의지가 춤추니 나를 둘러싼 관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와 연결된 사회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여자를 사적 존재로 가정 안에 매여 살게 하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게 되었다. 내 몸을 내가 접수하는 일, 그건 개인적인 결단 같지만 사회와 연대하는 길이었고 결국 정치적인 행위였다.


자기돌봄이 중요한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내 몸을 내가 접수하고 보니 기존의 질서에 고분고분할 수 없었다. 내 몸을 함부로 대하는 병원 시스템에 분노했다. 나를 고분고분하게 길들인 종교권력을 그냥 볼 수 없었다. 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모든 것들에 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여성의 급진적 자기돌봄은 정치적인 행위


시엄마는 평생 자식과 가족들 돌봄을 앞세우고 자기돌봄을 잊고 산 사람이다. 아흔이 넘어 불편한 몸이 되었을 때 아들들에게 의탁하는 건 가부장제에 순응한 삶의 자연스런 수순이겠다. 그의 평생의 인간관계는 결국 아들들로 축소된 셈이다. 아들 중심의 시엄마 삶에서 딸들은 '남의 집 식구'들이다. 평생 자기를 갈아넣어 아들 중심 남편 중심의 질서를 따랐으니 아들들로부터 마지막 돌봄을 받고 있는 셈이다.  


시엄마를 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는 과연 시엄마와는 다른 노년을 살게 될까? 다르다면 얼마나 다르게 살 수 있을까? 가부장적 질서에 절어 산 시엄마처럼 쪼그라든 인간 관계망으로 아들바라기 노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지만, 그걸 무엇이 보장할 수 있을까? 내가 가족 안에 갇히지 않으려 애썼으니, 내 노년은 얼마나 확장된 관계로 살게 될까? 분명한 건 더 상상하며 뒤집으며 창조하며 가야 하는 길이다. 


내 강의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상상력이 되고 희망이 되면 좋겠다. 지치고 바쁜 일상에서 오아시스 같은 새 힘이 되면 좋겠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자기돌봄을 실천하며, 연대하며 몸과 맘이 움직이면 좋겠다. 그래서 흑인 여성 운동가들이 '급진적 자기돌봄'이라 명명했으리라. 하찮게 취급받은 존재들이 감히 자기 몸을 사랑하고 자기돌봄을 우선하겠다니, 급진적인 정치 행위 아니고 뭐겠나. 


강의를 준비하며 김정희원의《공정 이후의 세계》를 다시 살피게 된다. 여성의 자기돌봄은 정치적인 행위 맞다. 급진적인 자기돌봄에 대한 부분만 조금 발췌해 본다.


급진적 자기돌봄을 '급진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윤리적 실천이 자신만을 향한 돌봄이 아니라 사회 개혁을 위한 돌봄이기 때문이다. 흔히 얘기되는 급진적 자기돌봄은 절대적으로 자신을 우선시하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명확한 정의가 부재한 탓인지 영어권에서는 "스스로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고 맘껏 소비하는 삼"을 부추기는 마케팅 용어로 전유되기도 했다. 마치 욜로 YOLO You Only Live Once 트렌드와도 비슷하게, 각자 다르게 해석하는 유행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런 접근과는 다소 다른 의미로 연대를 전제로 한 돌봄, 다시 말해 자기돌봄과 공동체를 향한 돌봄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돌봄의 윤리로서 급진적 자기돌봄을 정의하고자 한다. ... 그래서 많은 소수자들에게는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사회에 반하는, 충분히 급진적인 행위였다.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너의 아픔과 고통은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고 반복해서 말하는 세상에서 평생을 부정당해온 소수자들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끝내 스스로의 행복마저도 부정하게 되기 일쑤였다. 이들은 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폭력의 순간들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당연히 스스로의 행복과 평안을 돌보는 법을 익혀야 했다. 134-135


급진적 자기돌봄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나의 회복이 곧 모두의 회복인 돌봄. 연대를 위한, 손을 맞잡기 위한, 동지가 되기 위한 돌봄. 내가 속한 공동채를 변화시키는 자기돌봄. 그러므로 자기돌봄은 곧 타자돌봄이 된다. 사회적 부정의와 제도적 공백 속에서도 삶을 이어나가기를 선택한 우리는 서로를 지키고 보호하는 투쟁과 연대의 한 양식으로서 급진적 자기돌봄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135쪽


우리는 두려움 없이 도움을 청하고, 서로를 돌보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사회의 윤리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면서 상호부조의 기반을 만들자. 내가 힘들 때 나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지, 그리고 그들과 어떻게 연락이 끊기지 않을 수 있을지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생각하자.  137


급진적 자기돌봄은 나의 고통이 사회적 부조리 및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스스로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다. 일터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 적극적으로 회복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언론을 통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소식을 접할 때 그런 소식이 나의 감정과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다. 다층적이고 다양한 개개인의 상황 속에서 자기돌봄에 집중하기 위해 회복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평소에 잘 익혀두고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138-139


급진적 자기돌봄은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그 누구도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지 않는, 그 누구도 불행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자들의 윤리다. 우리의 비전은 구조적 차별과 폭력이 사라진 사회, 모두가 온전히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에 있다. 그 사회를 조금씩 앞당기기 위해 나와 우리를 위한 돌봄의 양식을 지속적으로 발명하고 실천하자. 나 자신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타인들에게 손을 내밀고 돌보는 윤리를 실천하자. 그리고 두려움 없이 연대하자. 사회를 더 낫게 변화시키고 싶은 우리들에게 급진적 자기돌봄은 바로 '지치지 않고 투쟁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140

/ 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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