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시답잖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녀로 만나서 친구요 페미니스트 동지로 살고 있는 30대 딸과 60대 엄마의 그렇고그런 이야기입니다. 여기저기 내키는 대로 쏘다니며 세상을 알아가는 이야기라, 유랑기죠. 걷기, 운동, 토론, 맛있는 거 먹기, 요리, 여행, 그리고 집안일. 모녀는 6년 째 매주 일요일 이른 아침에 서울을 이리저리 걷고 있어요. 맞는 시간이 일요일 뿐인 이유도 있죠. 대신 한 달 최소 두 개 줌 토론 모임도 함께 하고, 아주 가끔 여행을 하죠. 해외라고 못 쏘다닐 이유가 있을까요? 자~ 같이 걸어 볼까요?
요런 짧은 소개글로 새 브런치북 <3060 모녀 유랑기> 연재를 시작한다.
모녀 이야기는 자주 쓰는 글이지만 본격 브런치북으로 열긴 처음이다. 모녀관계, 내겐 끝없는 이야기 보따리요 영감 덩어리이자 세상을 읽는 중요한 창이라 말하고 싶다. 나는 엄마의 딸이고 또한 내 딸의 엄마니까. 어느 것도 내가 설계하고 계획해서 맺은 관계가 아닌, '어쩌다' 얻어걸린 선물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감자인가 하면 분노와 갈등의 근원이며, 평생 알고 싶은 심오한 주제이기도 하다.
모녀 이야기를 이 시점에 쓰겠다고? 지금 글쓰기 주제로 합당한가, 내 안의 검열관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선 윤석열의 내란으로 2024년 12월 한 달은 온 나라가 '비상시국'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주 항공 참사까지 일어났다.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은 잠 못 드는 나날을 사는데, 이 시국에 무슨 유랑기냐, 누군가 째려보는 것만 같다. 맞다, 그러나 아니기도 하다.
두 달 전 11월 1일 나는 아흔의 친정 엄마와 영원한 작별을 해야 했다. 엄마의 죽음은 내 삶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내게 엄마란, 하나로 다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장례식과 유품 정리를 끝낸 후 나는 심호흡을 하며 결심했다. 당분간 외부 활동을 줄여서라도 '사모곡'을 쓰는 시간을 갖겠다고. 그렇게 애도의 글쓰기를 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으리라고.
야속한 세상, 글을 쓰며 엄마와 '잘' 이별하고 싶은 내 야무진 꿈은 3주가 안 돼 접어야 했다. 상상에도 없던 '비상계엄령'이었다. 12월 3일 그 밤부터, 애도의 글쓰기를 멈추고 나는 광장으로 나가야 했다.
비교적 규칙적이던 일상이 깡그리 깨지고 있었다. 겨울 동안 시작하려던 새 책 작업도 일단 뒤로 밀렸다. 제 시간에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건 기본이요, 새벽이 되도록 뉴스를 찾아보는 올빼미가 됐다. 행여 놓친 게 있을까, 하루라도 정치 뉴스를 안 보면 불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다 와락 엄마 생각이 나면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대혼돈의 시간이었다.
사모곡 브런치북은 14꼭지로 닫아 버린 후 글을 못 쓰는 두어주를 보내며 후회했다. 애도의 글쓰기를 시국 이야기로 이어갈 걸, 엄마한테 화를 쏟아내며 속풀이라도 할 걸 그랬다고. 결국 새 브런치북을 쓰기로 했다. 친정 엄마를 애도하며, 내란 시국을 두눈뜨고 지켜보며, 179분의 무안공항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께 조의와 애도를 보내며, 이것들을 분리할 게 아니라 다 함께 쓰자고 말이다.
쏘다니며 세상 구경하고 배우는 3060모녀 유랑단, 이제 그 시답잖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2024년 12월의 마지막 일요일 7시가 안 된 이른 아침 3060모녀는 혜화 집을 나섰다.
두꺼운 패딩과 모자 장갑 목도리 방한화로 단도리를 하고 와룡공원쪽 성곽길을 올랐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많이 다닌 걷기 코스기도 하다. 하얀 이밥처럼 쌓인 눈을 보며 엄마를 생각했다. 내 마음을 아는 양 아침해가 등 뒤에서 따스한 기운으로 밀어주었다. 성곽의 바깥쪽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깊은 숨을 쉬며 올랐다. 싸늘하던 몸이 점점 훈훈해지고 땀이 배어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슴을 활짝 열어 아침해를 안았다.
걷고 걸었고 서울을 내려다 보았고 다시 산길을 내려갔다.
북촌 쪽으로 가다 헌법재판소 앞을 지나는데, 담장이 온통 꽃으로 에워싸인 게 보였다. 뉴스 화면으로만 보던 장면을 실제로 만나니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윤석열의 탄핵을 반대한다는 사람들이 갖다 놓은 인조 화환이었다.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 배달되는 사다리처럼 세워진 꽃무더기에 글귀를 적은 리본들이 드리워져 있었다. 꽃이건만 곱게 보이지 않았다. 빈틈 없이 세워진 게 마치 담장에 칭칭 감긴 쇠사슬처럼 보였다.
플라스틱 꽃 앞에 가로로 쳐진 줄에는 "탄핵반대"를 외치는 코팅된 흰종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꽃무더기를 헤치고 길게 늘어뜨려진 분홍 띠도 내용은 비슷했다.
"부정선거 밝혀야 나라가 바로 선다."
"헌재는 탄핵을 정치재판 말라."
"윤석열 대통령님 힘내십시오!"
끝이 없었다. 지금 여기가 바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의 압축판이었다.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건물로 출근하고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드나들까. 저만치 앞서서 글귀를 읽고 있는 딸을 향해 내가 물었다.
"딸, 근데 이 많은 쓰레기는 언제 어떻게 치울까?"
딸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가져다 놓은 사람들이 치우기까지 할까? 쓰레기 장난 아니겠어 정말."
그러게 말이다, 라며 딸 뒤를 따르는데 훅 엄마 생각이 났다. 이 험한 꼴 안 보고 90세 엄마가 11월에 떠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분홍 띠로 외치는 목소리엔 우리 아빠도 있을 것 같았다. 투표 때마다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울 엄마. 엄마가 지금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 여자 몇 가마의 쌀 씻어 밥을 지어 왔을까
구이람
장독 뚜껑 몇 천 번 여닫으면서 그 여자
목구멍에서 창자 끝까지 몇 만 킬로나 걸어왔을까
검은 옷 빨고 삶아 흰 옷 다듬이질하면서
배내옷에서 壽衣까지 몇 만 번 갈아입고 살아왔을까
그 여자 몇 가마의 쌀 씻어 밥을 지어 욌을까
사랑하는 엄마!
엄마, 김성교(1935~2024)님 수고했어. 이 풍진 90년을 여성으로 살아내느라 고생했어. 다시 만날 그날까지 잘 쉬고 있어. 거기 좋은 나라에선 맨날 밥 하는 청춘으로 종종대지 않겠지? 칭칭시하도 없고, 자식들 먹일 걱정도, 먹고사는 걱정도 없을 거야. 남들 위해 기도한다고 새벽잠 설치지도 말고 쉬고 있어, 엄마.
나도 후회 없이 엄마한테 갈 수 있게, 밥에 매인 삶 살지 않을 거야. 엄마가 살고 싶던 삶 내가 마저 마치고 갈게. 여기서 벌어지는 이 험한 꼴은 잊어 버리고, 맘대로 돌아다니고 자유롭게 살아.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