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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인 이야기를 쓰자,《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20년 가까이 회원활동하던 한 단체를 비건 배제 이유로 종지부를 찍었다.

by 꿀벌 김화숙

“저는 한국계지만 미국인이기 때문에 때로는 ‘충분히 한국인’이 아닌 것 같았고,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어요. 비슷한 경험을 한 아이들이 곳곳에 많지만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는 많지 않은 것 같았죠. 이 책을 통해 ‘너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은 너뿐만이 아니야. 뭐든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주고도 싶었어요.”


2021년 미국 뉴베리상 수상 작가 태 켈러가 어린이 독자들을 생각하며 작품《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에 대해 한 말이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는데 한국계 미국인 젊은 여성이 수상했다는 기사를 보고, 작가도 작품도 아주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한국의 옛날이야기를 소재로 자전적 소설이라니, 어서 읽어야지 했다. 그러나 4년이 가고 이제야 읽었다. 7년 차 토론모임 '백합과장미' 7월 토론 책이었다.


토론 모임에 안 빠지고 따라가면 꾸역꾸역 책을 읽게 된다, 라고 고백하곤 한다. 월 토론 모임이 5개 돌아가다 보니, 진행자로서나 토론자로서나 생존 독서겠다. 토론 없으면 좋은 책을 놓쳤겠구나 자각하면서 . 내가 진행하지 않는 달이라 수다도 많이 떨 수 있었다. 한강의 소설들을 제치고 올해 내가 읽은 최고의 문학이 될 예감이다. 내일 '돌봄 글쓰기' 두 번째 강좌에서도 이 책 이야기를 침이 마르게 하게 될 거 같다. 자전적 이야기를 쓰자, 자전적 에세이를 쓰자.


'4분의 1 한국인'이라 여겼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할머니가 미국으로 이민 가서 독일 남자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작가의 엄마는 미국인과 결혼했다. 스스로 '충분히 한국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어느 집단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않는 느낌에 익숙했단다. 우리 입장에서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호들갑 떨지만 독일 입장에선 독일계 미국인이겠지. 그리고 미국인은 그냥 미국인이라 할 테고. 정체성이란 이렇듯 깔끔한 경계가 없는 거다.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지만 모호한 경계의 느낌 결코 낯설지 않다. 어느 집단에 온전히 소속되는 느낌은 도대체 어떤 걸까? 그게 오히려 궁금하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고, 나도 나를 뭐라 명명할지 모르겠고, 어느 집단에선 소속감 느끼지만 어디서는 지지리 소수자인 게 나니까. 내일 틀림없이 힘주어 말하겠지. 그러니 쓰자고. 자기 안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자고. "어떤 이야기는 갇혀 있길 거부한다"라고.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은 나를 위한 작품이었다. 호랑이를 워낙 좋아하는 데다, 내 안에는 갇혀 있길 거부하는 호랑이가 있고, 내가 호랑이니까. 단군신화에 곰은 100일 동안 마늘 먹고 여자가 되었는데 호랑이는 못 견디고 달아나버렸다? 그 호랑이는 어찌 되었을까? 거기서 시작해 책 한 권이 됐는데, 그걸 나는 왜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빈약한 내 상상력이 자극받고 활개 치게 하는 책이었다.

이민자의 이《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식민 지배와 가난 속에서 용감하게 삶을 헤쳐 나간 한국 여성들과 그 딸들에 관해, 자기 가족사에 관해 은유적으로. ‘강인한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이면서 ‘호랑이 소녀’ 5대의 연대기." 이게 바로 호랑이 이야기다. '조용한 아시아 여자'라는 통념에 갇혀 답답했을 릴리. 그 안에 실은 호랑이가 있다. 누구에게나. 할머니에게도 엄마에게도 언니에게도. 한쪽 면만 인정하고 한 가지 모습만 강요하는 세상이 문제였다.





책에서 발췌한 하나만 예로 들라며? 인용해 본다.


"신의 실수는 바로 호랑이 소녀에게 하나만 선택하게 한 것이었지요. 호랑이 소녀가 자기 모습을 숨겨야 하는 세상을 만든 것이었지요. 그런 세상이니, 호랑이 소녀는 자기가 동시에 여러 존재라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자기가 맹렬한 동시에 친절하다는 것을, 부드러운 동시에 강하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310


내 이야기였다. 나는 맹렬한 호랑이 소리 들을까 두려워 부드러운 모습을 연기하며 살다 망한 경우니까. 결국 내 안의 맹렬한 호랑이는 포효하고 튀어나왔어야 했으니까.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나, 맹렬하면서도 친절한 나를 인정하고 드러낸 후 나는 자유로워졌다. 오늘도 결국 내 안에 갇혀있기른 거부하는 진실의 목소리. 호랑이 소리를 내고 말았다.


두려워하며 관대한 척 참아오던 문제 하나를 마무리했다는 말이다. 20년 가까이 회원활동하며 후원해 오던 단체 하나와 결별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였다.


아주 '하찮은' 문제가 내 결단력에 기름을 부었다. 내가 비건지향으로 산지 10년이니, 회원활동하는 단체마다 어지간하면 이건 비밀이 아닌 진실이다. 그런데 진실은 늘 호랑이 같다. 내가 불편한 존재로 드러내지 않으면 단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비건이 무시되는 걸 봐야 했다. 8월에 춘천으로 함께 갈 일정 자보가 올라왔는데 점심 장소가 '닭갈비집'이란다. 벌써 몇 년째인지 반복되는 코디디였다.


내가 이의를 제기하면 선심쓰듯 다들 막국수도 있으니 먹으면 될 일이라는 반응이었다. 비건이 배제된 의사결정 과정부터 문제적이었다. 단지 채식만 먹을 수 있으면 고깃집이라도 상관 않는 비건? 문제 될 게 뭐냐는 식의 그 인식, 참으로 불편했다. 옆에서 닭 생명을 폭력적으로 죽여서 불에 지져 먹는 사람들 곁에서 명화롭게 채식하라고? 거기 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한 끼 식사에 반드시 육류가 포함돼야 한다는 사람들이 볼 때, 나는 번거롭고 까탈스러운 소수이자 맹렬한 호랑이가 되는 거였다.


내가 결단할 때라 여겨졌다. 비건은 시혜의 대상이 아니다. 장애인 비장애인이 어울리면 장애인에게 맞춰야 함께 사는 거고, 비건이 섞인 모임에서 음식 결정은 비건에게 맞추는 그런 포용적인 세상에 살고 싶었다. 어느 해엔 나더러 비건 강의 하게 하고선 점심은 닭갈비집, 거기서 나는 막국수 먹었다. 그때의 기억이 더오르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시혜는 필요 없다. 여기까지구나, 거기 내 자리는 없으니, 후원 끊었다.


이게 바로 내 안의 호랑이였다. 덫에 가둘 수 없는 호랑이, 갇혀 있길 거부하는 내 이야기였다.



발췌


‘조아여.’ 언니가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우리 같은 아시아계 여자애들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고정관념을 뜻하는 말. 언니는 그 고정관념에 들어맞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른다, 까만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카락 한 뭉치를 탈색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가감 없이 내뱉음으로써. 32.


“어떤 이야기인데요?”

“호랑이들이 나를 찾고 있어.”

할머니가 내 팔을 아래위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내가 호랑이들 것을 훔쳤어, 옛날 옛날에, 너만큼 작을 때 그랬어. 그런데 이제 호랑이들이 그거 되찾고 싶어 해.”

“잠시만요. 네? 이거 할머니 이야기예요?”

“이 이야기는 진짜야.” 45


“할머니가 괜찮으리라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몰랐어. 그래도 나는 나를 믿었어. 그리고 믿으면 용감해. 가끔은 믿는 게 세상에서 가장 용감해.” 65.


호랑이 덫을 함께 만드는 건 언니와 나였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아프다. 이건 자매들의 이야기인데. ‘우리’ 둘이었어야 하는데. 147


벌떡 일어서서 호랑이 덫을 보자마자 나는 흥분에, 또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뜻대로 되었으니까! 그러나 또한, 뜻대로 되고 말았으니까… 나의 지하실에 호랑이가 있다. 덫에 붙잡힌 호랑이가 있다. 170


치유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원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거야. 이야기도 마찬가지.

가슴속이 꽉 차는 이상한 느낌, 마치 내가 터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만 말한다.

“나한테 필요한 건 우리 할머니가 낫는 거야.” 218


이토록 화난 할머니 목소리를 나는 처음 듣는다. 할머니는 강하고 맹렬하고 친절하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르다. 무서운 면이 있다, 마치 할머니 몸속에 튀어나오려고 난리를 치는 호랑이가 숨어 있는 것 같다 121


“그런데 내가 도서관 일을 아주 오랫동안 했거든. 그러면서 배운 거 하나는, 이야기에선 질서와 정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거야. 감정이 중요하지 그리고 감정이 늘 이해가 되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야기란…”

조가 두 눈썹을 모은 채 잠시 있다가 적당한 비유를 찾아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다.

“…물 같아. 비 같고. 이야기는 우리가 꽉 잡아 보려 해도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거든.”235


“그래도요 할머니, 슬픈 이야기를 숨기는 건 안 좋은지도 몰라요.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숨긴다고 해서 과거가 지워지는 것도 아니에요. 갇혀 있는 것뿐이지.”275


언니는 창백해진 얼굴로 벽에 몸을 붙이고 나를 본다. 언니 눈에 보이는 나는 누구일까? ‘조용한 아시아 여자애’는 이제 아닐 텐데, 그렇다면 누구? 아마도 제멋대로인 여자애. 절반은 호랑이. 284


“그 이야기들 때문에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 것 같아.”

호랑이의 귀가 움찔한다.

“어떻게 변했는데?”

나는 큰 숨을 들이쉬곤 말한다.

“정반대인 것들을 동시에 원하고 느끼게 됐어. 어떻게 이렇게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지? 그리고 뭘 느껴야 옳은지, 뭘 원해야 옳은지를 모르겠어.”

“넌 뭘 원하는데, 릴리?”

내 심장이 뛴다. 가슴이 가득 차오르는, 터질 것 같은 그 기분이 다시 든다.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시길 원해. 그러면서도 할머니가 더는 아프고 힘드시지 않길 원해. 그리고…”

목소리가 갈라지고 더는 말을 못 할 것 같지만, 그냥 말한다.

“…병실로 돌아가서 할머니랑, 가족이랑 같이 있고 싶은데, 또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어.”302


“네 역사를 통해서 네가 어디서 왔고 누구인지 이해한 다음에, 너 스스로의 이야기를 찾아봐. 네가 어떻게 될 것인지 직접 지어 봐.” 303


“나, 평생 내 심장 숨기려고 너무 많이 시간 쓰고 힘썼어. 나 호랑이도 무서웠는데 내 속에 있는 호랑이 더 무서웠어. 내 말 숨겨야지 생각했어, 영어 잘 못하니까. 그리고 내 마음도 숨겨야지 생각했어, 너무 많은 거 느끼니까. 그리고 내 이야기도 숨겨야지 생각했어, 말하면 나 영원히 그 이야기 같을까 봐.” 306-307


신의 실수는 바로 호랑이 소녀에게 하나만 선택하게 한 것이었지요. 호랑이 소녀가 자기 모습을 숨겨야 하는 세상을 만든 것이었지요. 그런 세상이니, 호랑이 소녀는 자기가 동시에 여러 존재라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자기가 맹렬한 동시에 친절하다는 것을, 부드러운 동시에 강하는 것을 두려워했어요. 310


어디에서도 답을 찾을 수 없으니, 나는 직접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우선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했다.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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