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성차별을 깨는 최초의 복음 창세기 3장 16절 단상

by 꿀벌 김화숙

"우리는 왜 불평등한 부부로 살게 됐을까?"

"성서는 어떤 부부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을 그렇게나 공부하고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불평등 관계를 '신성한 가정'이라 믿고 살고 있냔 말이다. 내 믿음을 흔들고 해체해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믿음이라면, 차라리 믿음 없는 '불신의 자유'를 택하고 싶었다. '신성한 질서' 따위 걷어내고 사람과 사람으로 사랑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근거를 찾아 보기로 했다.


먼저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에서 3장 16절을 뚫어지게 들여다 보았다.


"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3장은 성서 전체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일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형벌, 낙원에서 쫓겨남, 달라진 신인관계와 인간관계, 하나님의 사랑, 구원의 원시 복음 등등. 이런 거창한 주제로 읽히는 텍스트인데, 그래서 성경 다시 읽기, 다시 질문하기다. 은유와 상징과 반어의 문학으로 다시 보였다.


문자적으로 무오류라는 식으로 읽지는 않겠다. 이를테면, 여자가 겪는 임신과 출산의 신비를 죄로 인해 몸에 가중된 고통 서사로만 보는 건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죄 때문에 아담과 하와의 관계 역시 파괴되는데, "여자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 했다.


모든 텍스트는 기록될 당시의 시대와 공간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 말하고자 하는 바와 텍스트의 문자가 다를 수도 있고, 상징과 반어도 있고, 이면을 읽기, 뒤집어 읽기도 해야 맞다. 성서만이 아니라 고전이라는 책도 문학도 마찬가지다. 주인에게 충성하고 주인의 인정을 받는 노예 이야기를 읽는다 치자. 노예제를 지지하는 근거로 읽는 이가 있는가 하면 노예제 반대의 근거로 읽는 이도 있게 마련이다. 여성 서사도 마찬가지다. 춘향전을 여성의 정절을 찬양하는 '여필종부 서사'로 소비될 수도 있고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성'을 볼 수도 있다. 그렇다. 성경의 많은 인간 이야기, 특히 여성 관련 텍스트가 그랬다.


그럼 창세기 3장 16절이 말하는 여자와 남편의 관계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여자는 오매불망 남편을 원하는데, 남편은 여자를 다스릴 거란다. 엇갈린 사랑의 예고처럼 들린다. 여자는 귾임없이 남편 바라기로 자신을 갈아 넣는데, 남편 관심은 여자 자체가 아니라 여자를 다스리는 데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근거일까, 여성 해방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걸까?


숨겨진 하늘의 뜻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장 15절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예수 복음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창세기 3장 이야기 역시 그 속에 숨겨놓은 '복음'에 비추어야 한다. 즉 원시복음이라 칭해지는 3장 15절을 관통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 흐릿하지만, 인간의 죄와 형벌에 구원의 복음이 이어지는 점에 주목하자. 이제 이후 인간이 겪을 모든 부조리와 타락은 이미 선포된 구원의 복음에 비추어 읽어야 하는 거다. 인간의 삶의 현실은 그대로 구원과 해방이 필요하다는 역설이요 증거로 제시되는 셈이다. 구원받은 인간에게 무엇이 어떻게 회복되고 해방되어야 하는지, 뒤집어 보여주는 이야기다.


실낙원에서 남녀 관계는 일그러지고 파괴된다. 어떻게? 낙원을 잃어버린 여자의 삶을 압축해 보라. 평생 임신과 출산에 매이고 남편에게 매이고 지배받는 삶이란다. 이걸 이 땅에서 지켜야 할 '거룩한 질서'라고 읽을까? 깨뜨리고 해방되고 회복되어야 할 부조리로 읽을까? 구약과 바울서신들이 그러하듯,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거룩한 질서'로 둔갑시켜야 할까? 부조리극을 감상할 수준이 못되는 성경읽기다. 중세 마녀사냥의 역사를 보자.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예수가 과연 인간을 구원하고 해방했는가? 구원했다면, 구원받은 여자와 남자는 어떻게 다른 삶을 살게 되지? 일그러진 관계로 살다가 죽은 뒤 하늘나라에 가는 게 구원이라고? 그럼 예수가 이땅에서 가르쳐 준 기도는 무슨 의미가 있지?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예수는 분명 이 땅에 사는 동안,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길 기도했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했다. 무릎꿇고 기도만 하라고? 삶의 기도, 삶으로써 그 뜻이 이루어 지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 것처럼 평등과 자유로 살기다. 예수는 전 생애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보여줬다. 모든 눌린 자 갇힌 자 매인 자를 해방하는 복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게 곧 예수에게 하는 거라 했다. 봉우리는 깎고 골짜기는 메꾸는 평등 복음이었다. 당시 대세를 이루던 종교와도 정치와도 전혀 타협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그럼 다시 살펴보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임신과 출산이 여자가 겪는 징벌적 고통으로 본 건 창세기 기록 당시의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겠다. 즉 여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임신 출산이라는 경험, 그걸 죄와 연결해 불평등을 정당화했다. 여자의 죄 때문이라는 관점. 문자적으로 복종하리?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 바로 낙원을 잃어버린 인간이 하는 여성 혐오와 성차별을 보여주는 거다. 다르게 읽어 보라. 임신 출산이 여자만의 일인가? 결국 남자와 여자가 정말 사랑하고 함께 짐을 지는 게 마땅한데 여자만의 일로 성 역할 이원론으로 나눠버린 게 실낙원이다.


여성의 현실은 구원이 필요한 세상을 보여주는 바로미터 같은 거다. 임신 출산이 과연 여자만의 일인가? 이 대전제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창조의 신비요 남녀 사랑의 선물인 임신과 출산이 여자가 겪어야 할 죄의 삯 취급받는 것. 그게 바로 실낙원의 처절한 단면이란 말이다. 여자가 가진 특별한 생명 창조의 능력이, 재생산권이, 여성 혐오와 차별의 근거가 되는, 이게 바로 실낙원의 핵심인 셈이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Your desire will be for your husband.


타락한 남녀관계의 핵심이다. 여자가 남편에게 매여 사는 관계. 여자는 실낙원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잃어버리고 남편을 향한 기울어진 권력관계에서 매이게 된다. 여자가 하는 사랑도 욕망도, 기울어진 권력관계에서 마치 남편의 위성처럼 그에게 맞추고 그를 맴돈다. 여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하고 남편에게 맞추려는 경향성을 학자들은 '자기 포기'의 근원적인 죄라고 이름했다. 욕망도 기호도 생각도 자기를 잃은 삶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He will rule over you.


이게 압권이다. 거꾸로 읽어 보라. 만약 남편이 여자를 다스린다면, 그게 바로 실낙원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구원과 해방이란 바로 이런 기울어진 권력관계가 바로잡아지고 자유와 평등의 관계로 가는 거다.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려는 경향으로부터 남자는 구원이 필요하다. 이게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라고? 저주에 매인 관점이다. 남자의 이런 경향성을, 학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는 근원적인 죄, 교만이라 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걸 오늘날의 언어로 풀어 보면 더 쉬워진다. 남자가 힘을 더 갖고 남자가 우위에 서고 여자를 다스리는 시스템을 뭐라 부를까? 가. 부. 장. 제. 타락한 시스템이다. 남자는 여자를 자기 뜻 안에 두려는 경향성. 자기 뜻에 여자가 따르도록 무언 유언으로 통제하려는 경향성. 여자가 남자의 허용 범위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폭력도 불사하며 지배하려는 경향성. 노예와 주인 관계처럼 말이다.


창세기가 기록된 당시는 오늘날의 언어가 없었다. 그럼에도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일그러진 여남관계를 압축해 보여준다. 실낙원이라는 말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보면 된다. 인류 역사를 보라. 가부장제로 움직여왔다. 구약도 신약도 모두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이야기투성이다. 그걸 거룩한 질서로 읽어야 할까? 지독한 오독이다.


남편과 아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가장 가깝다는 관계가 이럴진대 나머지 인간관계는 말해 무엇하랴. 세상은 남성 지배체제로 신분과 계급이 있었다. 인류 역사에 숱한 혁명의 피를 흘려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남성중심주의는 결코 깨진 적이 없다. 전 세계의 이성애 결혼제도 자체가 남성 가계 중심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은 달라야 한다.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해방된 삶, 지배받지 않는 삶이 구원이다.


놀라운 해방의 복음을 다시 한번 거꾸로 질문하자. 창세기 3장 16절은 지켜야 할 거룩한 질서인가? 깨뜨려야 할 사슬인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유의 가르침을 너무 많이 들었다. 우라질! 시대적 맥락과 정황을 놓치고 문자적으로 성경을 배우고 가르친 자들은 회개할지어다. 노예처럼 복종하려 애쓰던 내 과거가 부끄럽다. 나와 함께 했던 자매들이여 나를 용서하라! 알고 보니 완전 잘못 배웠더라.


깨뜨려야 할 사슬인 걸 알게 됐으니, 페미니즘이 예수 복음 정신이란 걸 아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날이 무릎을 치며 말하게 됐다.

예수, 알고 보니 이사람 완전 페미니스트였구먼!

평등 세상은 여와 남 모두 페미니스트가 돼야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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