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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Jan 19. 2021

명의는 없다, 공갈과 협박만 있을 뿐

 "사람들 말만 잘 들어줘도 명의 소리 듣는데 그걸 못 혀."


명의

어향숙(1967~ )


요즘 사람들 병은 모두 속병인겨

말을 못 해서 생기는 병이지

사람들 말만 잘 들어줘도

명의 소리 듣는데 그걸 못 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자기 말만 들으래

내가 의사 양반 주치의인가?

홍씨 할머니

처방전 들고 약국 들어서며

혼잣말처럼 하신 말씀

내 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홍씨 할머니! 건강은 좀 좋아지셨는감요? 할머니 배짱 생각할 때 틀림없이 좋아지셨겠죠. 고마워요. 새해엔 더 건강하고 씩씩하시겠죠. 제가 말입니다. 할머니 하신 말씀에 무릎을 탁 치며 읽었어요. 할머니의 사투리흉내내며 시를 읽으니 찰진 말씀 맛이 더욱 착착 와닿았고요. 이런 살아있는 목소리 들을 수 있어 정말 기쁘답니다.


그런데 말이죠. 할머니라 부르는 거 말고 더 좋은 호칭이 없을까요? 우리 말은 이게 참 아쉬워요. 도대체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부르는 존칭이 없어요. 기껏 직업과 직책을 붙인다는 게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홍씨 할머니, 이것 말고 존칭 없을까요? 마담, 맴, 이런 비슷한 존칭 말입니다. 부인, 사모님, 어머님, 할머님, 어느 것도 맘에 안 들어요. 누구누구의 머시기잖아요. 결혼 출산 여부 불문, 나이 노소 상관없는 존칭 만들어야 해요.



시대도 문화도 달라지는데 언어가 못 따라오고 있으니 우짤거냐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홍씨 할머니를 굳이 할머니라 부른다는 게 너~~~무 맘에 안 들어서요. 우리 민증 까 볼까요? 뭐 나이 차이 좀 난다 칩시다. 그렇다고 할머니, 어머니로 불러야 할까요? 저는요? 우리 창의적으로 서로 이름 부르면 안 될까요? 저는 숙이고요. 오~~ 좋아좋아. 홍아! 이렇게 부르라고요? 말도 놓아 버리라고?


캬~~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어!






친구 홍아! 어때? 마음에 들어? 응 좋아. 내가 홍에게 꼭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 홍의 통찰과 일갈이 너무나 고맙다고 말이야. 홍이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삶의 진리가 있어.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고 있다가 결국 약국 가서라도 말해 버렸잖아? 그거 참 잘했어. 잘 한 일인 거 알지? 말 안 하면 사람들은 오해한다? 동의하는 거라고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듣고도 어지간하면 참는데 우린 너무 익숙하잖아. 속에 있는 걸 결국 말했으니 멋져!



근데 있지. 여기까지 쓰고 나니 홍아! 나 본능적으로 아차! 하며 숨을 고르는 거 알아? 나야 홍한테 무한 감정이입이 되니까 이러지만, 혹시 버러장머리 없는 여자들로 욕 먹을까 살짝 의식되는 거 있지. 뭐가 또 신경 쓰이는지 알아? 홍이 말고 의사 양반 두둔할 사람들 말이야. 홍이도 많이 들었지? "무슨 소리래? 의사 선생님 하라는 대로 하세요." 그니께. 굳이 굳이, 옳은 소리라며, 의사 양반 헤아리라, 끼어드는 목소리가 들려.



참 싹수없는 할머니로세. 너무 자기중심적이야. 의사 말을 잘 들어야 병이 낫지. 자기가 뭘 안다고! 의사 선생님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그렇게 잘 났으면 뭐 하러 의사한테 와? 기껏 처방해 줬더니, 저렇게 뒷담 까는 할머니들 있다니까. 밑도 끝도 없이 자기 말만 계속 늘어놓는데, 그럼 그 수다를 누가 다 들어줄 수 있겠어? 애초에 딱잘라야 해 저런 할머니들은. 들어 주면 끝도 없다니까? 콕 집어서 할 말만 하고 내보내는 의사 선생님이 현명한 거지. 바쁜데 언제 다 들어주겠어. 병원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저런 할머니들 때문에 의사들 너무 힘들어!.....



자기 말만 들으래

내가 의사 양반 주치의인가?


홍이는 어떻게 그걸 잘 깨달아 버렸어? 존경해. 아파서 의사 앞에 왔는데, 어째 환자인 나더러 의사 말만 들으라 하네? 내 말만 잘 들어줘도 나한테 명의 소리 들을 텐데. 캬~~ 그걸 왜 못하는가 이 의사 양반. 참 답답하지. 아니 솔직히 그렇게 살았더라 우리가. 어디 가도 남의 입장 먼저 헤아리고 목소리 큰 사람 입장 생각하고 거기 맞추어 살도록 말이야. 말이 되냐? 사람은 각각 존엄한데 말이야. 환자면 환자의 권리가 있고. 그런데 환자 보고 자기 말만 들으라는 의사들 진짜 문제 많아. 정신 차려야 해.



나도 딱 그렇게 살았다니께? 의사 말을 들어주는 환자 노릇했지. 이미 어릴 땐 아버지 입장 어머니 입장 헤아리고, 선생님, 목사님, 어디서든 거기 대장에게 고분고분하도록 길러졌잖아. 결혼해서는 남편 목소리와 남편 기 세우는 게 중요한 일인 줄 알았지. 어느 날 내가 아들에게까지 고분고분하다는 걸 깨닫는 사건이 있었어.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 이거 혹시 삼종지도? 내가 조선 유교 시대 인간도 아닌데 내 몸엔 삼종지도가 붙어 있더구나.



그 충격으로 분노하고 길길이 날뛰고 난리 난 적 있었지. 아들이고 남편이고, 의사고 목사고, 나를 한 인간으로 안 대할 거면 다 필요 없다는 진리였어. 선명해지더라고. 아하, 내가 의사 앞에서 왜 그렇게 화가 치밀었는지....


"내가 의사 양반 주치의인가?"

"내가 남편의 엄마인가?"

"내가 아들의 종인가?"







홍이 말 그대로 나도 의사한테 느꼈어. 내 간 절제 수술한 외과의사는 '세계적인 명의'였어. 내 간에서 암 덩어리를 잘라내고 날 살려 줬으니 참 고마운 분이지. 이 명의께서 수술 전부터 초지일관하는 대사가 있었어. "내가 다 알아서 합니다!" 내가 뭘 물을 수가 없었어. 질문할라 치면, 자기가 다 알아서 한대. 수술 전엔 뭘 모르는 환자였다 쳐. 그런데 수술 후 3개월 검사 결과 보는 날은 완전 공갈과 협박처럼 들렸어. 내 몸에 대해 내가 질문하는데, 자기가 알아서 한다, 그게 왜 궁금하냐? 그게 말이 돼? 그러면서 3개월 후에 오라는 말은 안 잊대?



명의께서 워낙 바쁘고 피곤한 거라고 이해하려 애썼어. 환자가 의사를 위해 감정노동하고 감정이입했다니까? 내 말을 하나도 안 듣는 의사를 내가 계속 만나야 할 이유가 있어? 그날 난 결정해 버렸어. 그 꼬라지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겠다 싶더란 말이야. 내가 의사의 주치의냐? 그후 6년간 나는 병원도 의사도 멀리하고 있어.



홍아! 네 목소리야말로, 너야말로 진짜 명의라고 말해 주고 싶어. 아니, 우리 몸이 우리의 명의 맞아. 왜냐, 우리 속에는 이미 100명의 명의가 살고 있으니까. 난 너도 나도, 우리 몸의 명의로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명의, 있으면 좋지 물론. 그런데 환자 목소리를 귓등으로도 안 듣는 명의가 필요해? 공갈과 협박으로 돈벌이나 하는 명의는? 어떤 감정노동도 없이 환자를 맘대로 부리는 명의? "명의는 없다"라는 게 맞지. 마치 위대한 목사, 엄청난 스님, 거룩한 종교인, 인류의 스승 따위 없는 것과 같아. 허상에 속지 말고 자기 몸의 주인으로 살자. 존엄한 인간으로 서로 대할 줄 모르는 명의, 모순이지. 네가 아주 쉽게 잘 말해 준 걸 내가 길게도 떠들었네?


사람들 말만 잘 들어줘도

명의 소리 듣는데 그걸 못 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자기 말만 들으래

내가 의사 양반 주치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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