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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ka Oct 25. 2020

겨울소년과 여름소녀, 그리고 병 속의 편지-10

6. 가자, 겨울소년에게로!

해가 떠오를 무렵, 어머니와 아버지가 깨기 전 몰래 떠나려는 해나에게 할머니는 무언가를 꺼내어 손에 쥐어줬다. 해나가 손을 펴보니 그것은 오르골이었다.


“이건 할머니의 보물 아니에요?”


해나는 할머니가 고조할머니께 받아 소중하게 여기는 오르골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말했다.


“그래, 근데 이젠 네 거야.”


할머니는 해나에게 오르골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며 말씀하셨다. 그러자 해나는 다시 벗어서 할머니께 드리려고 했다.


“아냐, 벗지 마. 나도 네 나이 때 우리 할머니께 받았지. 나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어. 이젠 너에게 줄 때가 된 것 같구나. 이건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보물이란다. 이렇게 열면 우리의 노래가 나오지.”


해나의 할머니는 오르골을 열며 말씀하셨다.


“저도 알아요. 할머니께서 저 어렸을 때 맨날 불러주셨잖아요.”


오르골에서 나오는 노래는 해나가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해나를 위해 자장가로 많이 불러주셨던 여름나라의 전통 민요였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혹은 축제 때마다 바닷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둥글게 모여서 손을 잡고 돌면서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것은 바다 멀리 가는 사람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그 노래를 들으면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 감싸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해나, 이걸 지니고 있으면 네게 힘이 되어줄 거야. 힘들 땐 언제나 이것을 꺼내어 들어보렴.”


해나의 할머니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해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속으로는 해나가 부디 별 일 없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할머니 근데 이게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오르골을 만지작거리며 묻자 할머니는 빙긋 미소를 지으셨다.


“네가 힘들 때 소중한 추억이 힘을 줄 거란다. 이걸 들으며 우리가 너를 사랑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렴. 너는 우리의 보물이야.”


할머니는 양 손으로 해나의 얼굴을 감싸 안고 해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해나는 그 말을 듣고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자, 울지 말고! 네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기다리고 있잖니? 마음먹었으면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출발하렴!”


해나의 할아버지는 해나의 등을 토닥이고는 해나를 카누 쪽을 향해 살짝 밀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영 해나를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자식은 언젠가 부모의 품을 떠나게 되어있다지만 언제나 해나가 아직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다.


해나가 마을의 다른 아이들보다 더 일찍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모험을 하게 된 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가라고 부추겨 놓고도 막상 떠나니 걱정됐다. 하지만 해나라면 어떻게든 결국 떠나려고 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쟤가 잘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해나가 배를 타고 떠나자 눈물을 보였다.


“걱정 마, 우리를 닮아서 씩씩하고 야무지게 잘 해낼 거야. 만약 중간에 무슨 일이 있으면 해나가 알아서 돌아오겠지. 해나가 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으니까.”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어깨를 안아주며 다독였다. 두 사람은 해나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해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걱정이 되긴 했지만 모두 해나를 믿고 있었다.


한편 해나는 처음으로 멀리 떠나는 길이 무섭다기보다는 설렜다.


언제나 여름나라를 벗어나 다른 곳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게다가 겨울나라에 가서 친구인 바론도 만난다고 생각하니 아직 어둠의 마왕 때문에 걱정된다기보다는 신나는 마음이 더 컸다.


“게다가 눈이 있는 곳이라니 얼마나 멋질까?! 안 그래, 두루?”


해나는 하루빨리 바론가 적은 편지에 나온 ‘눈’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졌다.


그렇게 해나가 탄 카누는 돌리와 다른 돌고래들이 인도해주는 방향으로 아무 문제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 하는 항해도 제법 순조롭고 해나는 왜들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를 걱정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맨날 돌고래들과 수영을 했는걸! 바다에 빠져 죽을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나는 자신감에 가득 차 두려움이 없었다. 며칠 후 폭풍우를 만나기 전까지.


구름이 조금 낀다 싶었는데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하늘이 컴컴해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굵은 빗방울에 머리와 옷이 다 젖어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바다에서 만난 폭풍우는 해나가 지금껏 살면서 겪어본 그 어떤 것보다 가장 크고 무시무시했다.


거센 태풍이 여름나라에 몰아쳐서 마을이 떠내려갈 위기에 처했을 때도 해나는 자기를 보호해줄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있어서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 해나는 아무도 없이 혼자 바다에서 폭풍우에 휩쓸리고 있었다. 폭풍우는 카누를 흔들기도 하고 뒤집어놓기도 했다.


돌고래들의 도움으로 다시 원상태로 뒤집어 놓기는 했지만 음식과 가져온 물건들이 많이 떠내려가기도 했다.


나침반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지도는 젖어서 찢어지려 했다. 게다가 할머니께서 주신 털옷은 물을 잔뜩 머금어 무거워졌다.


돌고래들은 해나의 카누가 다시 뒤집어지지 않도록 도와주려 했지만 비바람에 세서 카누에는 자꾸만 물이 들어찼다.


‘맙소사, 이러다간 정말 죽을지도 몰라!’


해나는 집을 떠나 처음으로 두려움과 추위에 벌벌 몸을 떨었다. 눈물이 나고 갑자기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집을 떠난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애를 도와주러 간답시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람! 그냥 엄마 아빠 말대로 집에 있을 걸. 알지도 못하는 데를 혼자 가겠다고 해서 벌 받은 걸까?’


그때 해나는 할머니가 목에 걸어주신 오르골 목걸이가 떠올랐다.


가족들이 보고 싶었던 해나는 오르골 목걸이를 손에 잡고 오르골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억지로라도 노래를 따라 부르니 무서움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다들 나를 지켜보고 있어. 나를 지켜줄 거야. 저를 살려주세요!’


노래를 부를수록 해나는 노랗고 따뜻한 불빛이 자신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한 기운으로 몸이 훈훈해졌다.


그때였다.

무언가 카누 밑에서 커다랗고 둔탁한 게 닿는 느낌이 들더니 물에 잠겨 있던 카누가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카누 밑의 뭔가가 바닷속에서 솟아오르면서 카누를 물 위로 들어 올리는 것만 형상이었다.


“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파도인가?”


해나가 카누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어 밑을 내려다보자 바다 물속에는 집채만큼 커다랗고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돌고래들은 어느새 그 그림자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저게 뭐지?’


카누 밑의 커다란 땅이 솟아올랐나 싶었지만 숨을 쉬는 듯 움직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생명체 같았다.


해나가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보니 그것은 커다란 고래, 혹등고래였다.


혹등고래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해나는 그게 크기로나 하는 행동으로나 혹등고래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혹등고래는 해나의 카누를 자기 위에 올려놓고 해나가 바다에 쓸려가지 않도록 양쪽 지느러미로 막아주었다.


‘고래가 나를 보호해주고 있어!’


해나는 할머니가 어렸을 적에 혹등고래를 봤던 이야기를 해주신 것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지금의 해나만큼 어렸을 때 바다 그물에 갇힌 혹등고래를 풀어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후로 혹등고래는 할머니와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와서 보호해줬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바닷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둥글게 손을 잡고 오르골에서 나오는 노래를 부르며 고래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했다.


아무래도 혹등고래가 할머니가 주신 오르골의 소리를 듣고 도와주러 온 것 같았다.


“할머니 말씀이 맞았어. 진짜 혹등고래가 우리를 보살펴주고 있어.”


해나는 나중에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이 이야기를 꼭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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