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번에는 시험관 한번 해보는 게 어때?”
“시험관 한 번 하는데 엄청 비싸지 않아…?”
결혼 후 4년간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과는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남편이 나를배려해 제안한 건데, 김빠지게 돈 이야기부터 꺼냈다. 말을 뱉으면서 나 자신이 참 옹색하다 싶었다.
시험관은 병원과 시술과정마다 조금씩 비용 차이가 있다. 당시에는 1회 당 300만 원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한번에 ‘임신 성공’이라는 쾌거를 이룬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통 두세 번 해야 성공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수년에 걸쳐 여러 번 시도 했어도 결국 임신하지 못 하는 경우도 물론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시험관 하는데 전셋집 보증금 하나 들어간다고들 말했다. 큰돈을 내고도 임신이 안 돼서 속 끓는 사례를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금 더 저렴한 인공수정을 해왔다.
함께 임신을 준비하는 지인들 중 한 명에게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 그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기 위해 다 함께 카페에 모였다.
“축하해요. 얼마나 마음 고생 많았겠어요. 이제 행복한 태교만 하세요.”
“고마워요.”
“정현이네는 이번에도 실패했대요.”
“벌써 몇 번째래요?”
“아마도 세 번째일걸요? 전세 보증금 날린 거죠. 뭐~”
아이가 찾아오는 일이 이토록 가벼운 대화거리가 되다니. 생명의 존엄이 부동산 투자 실패처럼 치부돼 불편했다. 남편이 시험관 제안을 하기 전 우리는 인공수정을 3회 시도했다. 아이가 단번에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일까? 첫번째 인공수정 실패 이후 상심이 컸다.
“두 번째 인공수정은 성공할 거야. 다시 시도해 보자.”
“그래. 소중하고 귀한 인연으로 우리에게 오려고 천천히 오나 봐.”
서로를 다독이며 한 달에서 두 달 정도의 휴식기를 가졌다. 몸 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병원을 찾아갔다. 약을 받고 배란 유도 주사를 맞아가며 난포를 키웠다. 완벽한 타이밍에 난포가 터져 착상되기를 기도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는 일도, 주삿바늘을 배에 찌르는 일도, 아이가 내게 온다면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간절함은 바람을 타고 스쳐 지나갔다.
두 번째 인공수정도 실패였다. 이때부턴 속설, 낭설 가릴 것 없이 다 믿기 시작했다. 여성호르몬을 촉진시킨다는 석류와 단백질이 풍부한 콩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보양식 등 임신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음식은 죄다 찾아 먹었다. 세 번째 인공수정 시술 당일. 컨디션이 유독 좋았다. 뭘 하든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만 같았다. 누워 있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시술실로 들어갔다.
2주가 지났다.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결과는 한 줄, 비임신이었다. 낙담과 상심이 길어지니 고민도 길어졌다. 다른 병원에 가서 인공수정을 해 볼 것인가, 남편의 말대로 시험관을 시도할 것인가.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아이가 우리에게 오는 방법을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건 꽤 무거운 책임감을 요구했다.
‘어휴, 됐어. 무슨 시험관이야. 큰돈 쓰면서 마음 졸이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 보자.’ 마음을 애써 비우기 위해 억지스런 행동을 했다. 하루에 세 번씩 산책하러 나가고, 물도 한 컵 마실거 연속으로 세 컵 마셨다. 어떻게든 몸을 계속 움직였지만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속마음을 막을 순 없었다.
‘아니, 근데 생기지도 않은 아이에 대한 모성애는 왜 이렇게 크고 난리야. 왜 임신에 집착하는 거지?’
길거리에 지나가는 아이들만 봐도 흐뭇하고 기분이 좋았다. 아이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볼 때면 괜히 생각도 많아졌다.
‘나도 저 육아용품 사고 싶다.’ ‘아이가 울 땐 저렇게 달래야 하는구나.’ 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한곳을 멍하니 응시하는 일도 많아졌다.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아이를 계속 기다리고 있기에는 아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만나자마자 나의 모든 사랑과 정성을 퍼부어 줄 생각이었다. 금액이고 뭐고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날 수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 시험관 시술은 인공수정을 할 때보다 더 많은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시도도 안 해보고 스트레스받는 것보다 되든 안 되든 일단 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리 시험관 하자.”
그날 남편과 함께 시험관을 진행할 병원을 알아보고, 상담 예약을 잡았다. 장거리 운전을 하며 남편과 왔다 갔다 한 지 4개월이 지났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좋은 소식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