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분만을 하기 위해 26시간 산통을 견뎠지만, 자궁문이 열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응급으로 제왕절개를 해야 했다. 몸을 회복하는 중에도 자연분만하지 못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래서 모유 수유만큼은 잘하고 싶었다.
오직 나만 아이에게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모유라고 생각했다. 젖을 물린 지 3일 만에 젖몸살이 왔다. 간호사에게 배운 대로 자세를 고쳐 봤지만, 어쩐지 수유 쿠션 위에 누워 있는 아이는 불편해 보였다. 무릎 위에 쿠션을 하나 더 받쳐도, 소파에 걸터앉아도 불편해 보이는 건 똑같았다.
나도 30분씩 부동자세로 앉아 있느라 허리는 뒤틀리고 다리에는 쥐가 났다. 유선은 시도 때도 없이 막혀 가슴이 단단하게 굳어갔다. 아이는 오랜 시간 젖을 빨아도 충분하지 않다는 듯 계속 울어댔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징그러운 과잉 모성이 극성을 부리며 스스로 스트레스를 가중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해주고 싶은 모든 것을 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다.
친정엄마는 모유량이 는다는 돼지족 우린 물을 권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냄새가 고약하다는 주의에도 괜찮다고 했다. 친정엄마는 어마어마한 양을 보내셨고, 남편은 육수를 보온병에 담아 매일 산후조리원으로 가져다주었다. 한 모금씩 들이킬 때마다 고약한 냄새와 함께 느끼함이 입안을 장악했다. 코를 비틀어 막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돼지족 우린 물을 매일 들이켰다.
아이가 80일쯤 되었을 때였다. 평온한 6월, 어느 평일 오후 공기는 아주 덤덤했다. 아이의 몸이 뜨겁게 느껴진 것이 착각일 리 없었다. 체온계 액정에는 빨간불과 함께 38.7도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오빠, 응급실 가야 할 것 같아. 빨리 가자.”
병원에서는 소변검사와 피검사를 해봐야 왜 아이에게 열이 어떤 바이러스가 들어갔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검사를 위해 180cm 정도 되는 긴 입원실 침대 위에 아이를 눕히고 소변 봉투를 채웠다. 간호사는 아이의 손등을 만지며 혈관을 찾았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내렸다.
“요로 감염으로 보여요. 입원 치료가 필요합니다. 항생제 투여하면서 지켜보도록 하죠.”
감염을 우려해 입원실 보호자는 한 명만 허용했다. 아이와 입원 생활할 생각에 걱정부터 밀려왔는데, 설상가상 1인실은 만실이었다. 어쩔 수 없이 텅 빈 6인실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큰 병실은 냉기가 흐르다 못해 으스스했다.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울면서 청승 떨고 있는 사이에 남편이 짐을 가지고 왔다.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는지 남편은 언제든지 힘들면전화하라는 말과 함께 병실을 떠났다.
아이와 함께 할 입원 생활만큼이나 수유에 대한 걱정도 만만치 않았다. 입원 전에는 자주 유선이 막히고, 가슴 통증이 심해 수유가 끝나면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에 갔었다. 그렇게 80일 동안 해오던 수유의 패턴이 한순간에 깨졌다. 아무도 없는 텅 빈 6인실. 딱딱한 병원 침대에서 어떻게 수유해야할지 막막했다.
입원 첫날, 모유 수유를 시도했다. 1인용 병원 침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알싸한 소독약 냄새가 나는 병원 베개를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위에 아이를 놓은 뒤에 젖을 물렸다. 아이는 한 번 먹으면 30분 이상은 기본으로 먹었다. 나는 한 시간은 꼼짝없이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다리를 구부린 채 어정쩡한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그때 간호사가 커튼을 확 치며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 체온 측정하겠습니다.”
간호사는 아이의 체온 측정과 항생제 투입 체크를 위해 수시로 병실을 들락날락했다. 심지어 남자 간호사였다.
“와, 도저히 못하겠다.”
모유 수유에 대한 집착은 나를 점점 피폐하게 만들었다. 제왕절개를 했다는 사실에 대한 미안함이 가져온 집착이었다. 언제까지 미안해야 하는지, 이건 누구를 위한 모유 수유인지, 진정 아이를 위한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끊임없이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