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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나물 봄동이 Sep 27. 2016

어떤 손님 1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내 모습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이 매거진 속 이야기들은 제가 혹은 누군가 겪은 일에서 출발합니다. 아, 물론 상상 속에서의 일도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소설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저는 소설이라고 부를 거예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우리 가게는 24시간 해장국집이 아니라 12시간 해장국집이다. 낮 12시에 문을 열어 밤 12시에 문을 닫는다. 24시간을 하는 건 무리가 있으니 밤 12시에 문을 열어 낮 12시에 문을 닫는 건 어떨까 가끔 진지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새벽에 오는 손님들 받자고 밤잠을 포기하는 건 생활의 질이 떨어진다는 신랑의 의견에 동의해 아직까지는 낮 12시 오픈을 지키고 있다.     




12시 25분. 홀 청소를 끝내고는 빗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어? 문 열었어?


깜짝이야.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입간판 옆에 군드러져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는 대뜸 반말이다.


-이렇게 문을 늦게 열면 어떡하나. 사람이 부지런해야지. 내가 여기서 얼마나 자네를 기다렸는 줄 아나?


그림이 그려졌다. 새벽까지 진탕 마신 남자는 오가며 본 ‘해장국’이란 글자를 떠올리며 우리 가게를 찾았다. 그런데 어둠 속에 가게 문은 닫혀 있다. 집에 가려는데 몸은 무겁고 배는 고프고 잠은 쏟아지고 그래 곧 있음 날이 밝고 그럼 문이 열리면 해장국을 먹고 가야지 여기 앉아서 잠시만 있자 그런데 나는 언제 잠이 들었던가 눈을 떠보니 아이구야 벌써 햇살 좋은 한낮이로구나, 뭐 이런 거겠지.


나를 ‘자네’라고 칭해서 혹시 단골손님인 건가 했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다. 좁은 동네이니 오가며 마주쳤을 수도 있으나 확실히 가게 손님은 아니었다. 손님이라면 영업시간을 그렇게 모르진 않았을 테다. 어딘지 얼굴이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만취한 중년 남자의 잔뜩 구겨져 있는 얼굴은 다 비슷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짜고짜 가게로 들어서려는 남자를 붙잡았다.


-저기, 손님. 죄송하지만 지금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요.


오늘은 주방 찬모도 휴무이고, 신랑도 오후 늦게 나올 예정이다. 나는 아예 점심 손님은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왜 날 손님으로 안 받아주려는 거야? 내가 늙어서? 내가 술이 덜 깨서? 내가 반말이나 찍찍 해대는 진상이라서?


뭐지? 순간 아직 온몸에 술냄새가 배어 있지만 이분은 맨 정신인 건가 싶기도 했다.


-사람이 말이야, 그러면 안 돼. 지금 내 모습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이야. 내가 술에 취해 이러는 게 나의 나쁜 점이라고 치자고. 그럼 이걸로 나를 다 평가해버려. 근데 그러면 안 돼. 사람한테 열 가지 면이 있으면, 그중 이건 한 가지 면이야. 나머지 아홉 가지 면은 모른 채 나의 한 가지 면만으로 나를 생각하지 말라고.


어쩐지 그 말은 꼭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하는 말 같기도 했다. 


-물론 이 한 가지 면도 내가 가진 면이긴 하지.


남자는 재밌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다음에 오세요. 다음에 오시면 제가 꼭 맛있는 해장국 드리겠습니다.


-다음? 다음은 없어. 오직 지금만 있을 뿐이야.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휘적대며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의 얼굴이 왜 낯익었던 건지 알았다. 오래전 젊은 나이에 알코올중독으로 돌아가셨던 삼촌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삼촌이 살아 있어서 나이를 먹고 결혼도 했다면 저런 얼굴이 되었으리라.     




그 후로 그를 본 적이 없다. 가끔은 그가 왔던 게 실제였는지, 아니면 정말 돌아가셨던 삼촌이 나타났던 건 아닌지 싶을 때도 있다. 


누군가가 가진 나쁜 점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그 나쁜 점이 그 사람의 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나중은 없다. 오직 지금이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그가 남기고 간 말들을 떠올리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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