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이동국을 보다
대학교 다닐 때, 문수구장에서 K리그 경기가 열렸다. 포항과 울산의 경기였는데, 텔레비전으로만 접했던 공격수 이동국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오랜 부상 회복 기간 끝에 돌아온 상태였다. 그날 경기는 조금 지루한 편이었다. 전반전은 0 대 0이었다.
후반전 중반에 다른 선수와 교체되어 들어온 이동국은 슬렁슬렁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골문 앞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멀리서 날아온 공을 머리로 슛을 시도했다. 골키퍼는 그 공을 막지 못했고, 그 골은 그날 경기의 유일한 득점이 되었다. 텔레비전으로 봤을 때 느꼈던 훌륭한 골감각과 멋진 골장면, 그 모습을 그대로 경기장에서 볼 수 있었다.
프로축구 선수로써 이동국은 무척 화려하게 등장했다. 10대의 나이에 쟁쟁한 선배 공격수들을 제치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게 된 것. 그리고 득점은 안 되었지만, 네덜란드 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중거리슛은 앞으로 이 선수가 우리나라 축구의 희망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였다.
탄탄대로를 달릴 것만 같았던 그였지만, 수많은 어려움 속에 힘든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20대 초반 독일의 분데스리가로 팀을 옮겼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후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 최종 명단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2022년 카타르에서 겨울에 열린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친 조규성. 좋은 선수인 것 같았지만, 뭔가 부족해 보였던 선수였는데 어린 나이에 군대를 일찍 다녀오더니 다른 선수가 되었다. 군대에서 근력 운동이 집중하며 근육량을 확 늘렸다. 상대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에서 쉽게 지지 않는 선수가 되었고, 이를 통해 그는 국가대표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공격수가 되었다. 군대에서 보낸 시간이 조규성에게는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었던 셈이었다. 이렇게 군대에서의 시간을 통해서 새로운 선수로 거듭나는 경우가 많다. 이동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동국은 2003년 광주 상무 불사조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운동에 집중했고, 많은 골을 넣기 시작했다. 국가대표팀 공격수로 다시 뽑혔을 뿐만 아니라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부터 좋은 골감각을 보여주면서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2005년 전역 후에는 포항 스틸러스에서 멋진 활약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는 누가 뭐라 해도 이동국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K리그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월드컵 개막이 두 달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축구 선수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무릎 부상이었다. 이 부상으로 인하여 이동국의 2006년 독일 월드컵 출전은 불가능해졌다. 그는 당시 26살이었다. 축구 선수로써 최고의 전성기를 보낼 수 있는 시기였다. 나는 그의 부상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월드컵은 끝이 났고, 당시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문수월드컵 경기장에서 울산과 포항의 경기가 열렸고, 그 경기를 보러 갔다. 경기는 사실 다소 지루한 편이었다. 득점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어느 한 선수가 교체 투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서 꽤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단 번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동국이었다. 방송으로만 봤었던 그의 경기 모습을 처음 직접 본 순간이었다.
득점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그가 다른 선수들이 무척 힘들게 하는 것을 쉽게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한 번은 경쟁에서 밀려서, 또 다른 한 번은 부상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 한 아픔을 그 골로 씻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동국에게 다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당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소속이었던 미들스보로에서 영입 제의가 왔고, 그는 프리미어리그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프리미어리그에는 2002년 월드컵 멤버였던 박지성과 이영표, 설기현이 활약하고 있었다. 네 번째 한국인 프리미어리거로써 그의 활약을 나는 기대했다.
그의 프리미어리그 데뷔 경기는 새벽이었다. 그의 이름이 선발 명단에는 없었지만, 교체 명단에는 있었고, 나는 그가 후반전에는 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경기를 지켜봤다. 예상대로였다. 이동국이 교체 선수로 경기에 투입되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오랜 시간 관심 있게 지켜봤던 선수가 굴곡을 겪은 뒤,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데뷔전 경기도 나쁘지 않았다. 골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측면에서 날아온 공을 지체 없이 바로 슈팅으로 연결했고, 아쉽게도 골대를 맞고 나왔다. 골은 없었지만, 거의 골에 근접한 상황이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이동국 역시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는 정말 훌륭한 수비수들이 많았다. 우리나라 K리그에서는 건장한 체격으로 그라운드 위를 누비던 그였는데, 프리미어리그 수비수들 속에 그는 무척 왜소해 보였다. 게다가 팀에는 주전 공격수로 나이지리아 출신의 야쿠부와 호주 출신의 마크 비두카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출장기회를 잡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1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프리미어리그 23경기에 출전했지만, 한 골도 득점하지 못했고, 국내로 돌아와야 했다.
그가 돌아와 뛰게 된 팀은 성남 일화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팀의 감독이었던 김학범 감독과 잘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동국의 영입을 김학범 감독은 탐탁히 않아했다. 국내에 돌아와서도 이동국은 많은 경기를 출전 못 했다. 그에게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이동국에게 제의가 왔던 전북현대모터스는 당시 K리그에서도 강팀에 속하지 않았다. 중하위권을 맴도는 축구팀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최강희 감독이 그를 설득했다.
“전북은 승점자판기였지.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을 거다. 나도, 구단도 많이 노력하고 있다. 동국이 네가 와준다면 분명 전북은 명문 구단으로 가는 새 역사를 쓸 수 있을 거야.”
감독이 이렇게 자신의 비전을 선수에게 이야기하면 선수의 마음은 흔들리게 된다. 게다가 최강희 감독은 이동국에게 이런 약속을 한다.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네가 먼저 손을 들지 않는 이상 선발에서 빼지 않겠다. 10경기에서 골을 못 넣어도 너를 믿겠다. 최근 2년 동안 잃은 자신감만 회복하면 넌 잘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네 기량이 대한민국 탑 레벨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최강희 감독을 믿고 전북으로 팀을 옮겼고, 곧바로 2009년 전북의 우승을 이끌어 내었다. K리그 29경기에 출전하였고, 21골을 넣었다. 득점왕이 되었고,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으며,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MVP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서른이 넘은 나이였지만, 그의 잔치는 이제 시작이었다. 전북에서 2020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8번의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거의 매 시즌 10골 이상을 득점하며 전북의 공격을 이끌었다. 그가 기록한 228골은 K리그 역대 통산 득점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당분간은 그 기록을 깰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는 K리그 통산 548경기에 출전했고, 이는 역시 통산 출전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기록이라는 게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오랜 기간 누적되어 만들어진 기록은 그래도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K리그 역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역경'을 이겨냈고,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경력’을 만들었다. 그의 발을 잡던 수많은 시련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뛰고 또 뛰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계속 노력하는 이에게 기회는 찾아오며, 이를 통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선수로 은퇴했지만 훌륭한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많은 어려움 앞에서도 이를 이겨 내고 30살이 넘어서야 자신의 시간을 써 내려갔던 그의 모습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