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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늘 Apr 27. 2024

독립 후 딸 노릇

어머니의 보호자


 안약을 처방받은 약봉지에 일흔이 넘으신 어머니의 연세가 찍힌다. 그동안 이 연세가 되도록 병원 한 번 입원하지 않으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에게 백내장이 온 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수술을 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냥 지내셨는데 정기적으로 안과를 다니지도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까 최근에 증상이 심해지셨고,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하셨다. 2기에서 3기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백내장을 늦추는 약이 있다고는 하는데 일 년을 넣으셔도 결국 수술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수술받을 결심을 하셨고, 나는 어머니의 보호자로 함께 병원에 갔다. 어머니는 수정체가 혼탁해져서 뿌옇게 보이는 상만 있으셨는데 그냥 두면 더 심해지기만 할 뿐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은 없어서 수술을 선택했다. 수술을 받기 위한 정밀검사를 위해 병원에 두 시간 동안 있었다. 그날도 백내장 수술하러 오신 젊은 분이 계셨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수술 결정도 얼마나 힘들었던가. 누군가는 쉽게 하는 수술도 우리는 왜 이렇게 마음을 졸이게 되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백내장 수술을 결정하시고서야 부랴부랴 기본적인 건강검진을 받으셨다. 다행히 고혈압과 당뇨는 없으셨다. 연세 때문인지 고지혈증과 골다공증 증세는 약간 있으셨다.






 어머니의 보호자로 수술 전 두 번, 수술 당일에 함께 병원에 가면서 신경이 많이 쓰였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면서 집중은 되지 않지만 챕터가 짧은 에세이집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나는 이제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일종의 기도 같은 것이다. 이번에 딸노릇 제대로 한다고 병원비도 내가 다 결제했다. 이제야 하는 딸노릇이지만 살아생전에 조금이라도 표현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리 집사서 독립한 딸이 라고 해도 내심 걱정도 많으셨을 텐데 아무 말 없이 응원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내 고생을 아셨는지 나의 결정에 반대하지는 않으셨다.









 나는 결혼 후 딸 노릇을 하지 못했다. 엄마, 며느리, 아내 역할을 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사는 거리도 멀어서 일 년에 서너 번 볼 정도였다. 원가족에서 셋째인 나는 원래 해야 할 일이 없기도 했다. 부모형제들이 잘 데리고 다니는 귀염둥이였다. 그런 내가 결혼 후 집안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맏며느리가 되었다. 부모님 세대와는 다르니까 예전 맏며느리와 요즈음 맏며느리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시댁은 예전 맏며느리의 모습을 원하셨다. 애들 키우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하셨다.




 아흔이 넘으신 나의 할머니도 애들 키우는데 돈 많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는데 시부모님은 오히려 돈 있으면 투자하는데 보태라고 하셨다. 나의 노동력까지 동원해서 한 일로 지방에 집을 셨다. 말 잘 듣는 사람 주실꺼란다. 현대판 천장의 굴비가 따로 없다고 여겨졌다. 그 정도로 시부모님은 나에게 평소 베풀지 않으셨다. 시어머니가 수술로 입원하셔서 하루 간병을 해드린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간병인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하시는 마음은 이해한다. 결혼 후 며느리 노릇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시댁에 가지 않을 핑계도 한두 번일 뿐, 나의 화병은 점점 심해졌다. 남편은 자기가 있지 않냐고 하지만 그런 남편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남편은 직장생활만 열심히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여러 역할들을 조금만 못해도 자리가 바로 티가 난다. 아파트 분양도 내가 추진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남편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너무 혼자서 힘을 쏟은 탓일까? 나는 정말 탈진했다.








 일방적으로 따르기만 해야 하는 가부장제 가풍이 나의 원가족보다 훨씬 심한 시집문화. 이제 겨우 끊임없는 맏며느리 역할에서 벗어나 나로서 숨쉬기를 한다. 바뀌지 않는 시부모님의 성격을 백세 시대에 함께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다. 

 하지만 20대부터 함께 한 나의 반쪽에 대한 감정은 정리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할 것이지만 법적인 다툼의 여지는 없도록 합의했다. 변호사를 통해서 재산 분할을 하고 여러 조항들의 법적효력을 명시했다. 그가 아는 나, 내가 아는 그 라면 다른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성에게 잘하는 편이 아니고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나와 잘살고 싶고, 아이들의 진학상황에 따라서 언제든 함께 살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 집 아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중고등학생 때 기숙사 생활을 해서 떨어져 지내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도 잠시 그런 시간이 생겼을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귀찮다. 또 돌봄의 늪에 빠진다는 생각뿐이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해주어야 하는 쳇바퀴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남편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면 그것은 정말 운명이거나 맏며느리가 필요한 상황일 것이기에 나는 기꺼이 도장을 찍어줄 것이다. 물론 우리는 부모로서 계속 함께 할 수도 있다. 그동안 나는 더욱 나로서 독립된 자아로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내공을 키워나가면 된다. 그동안 못한 딸 노릇도 소소하게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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