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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기념관

중정기념관, 2.28공원 그리고 선거

by Mong

중정은 중화민국의 2대총통이자 중화민국의 대만 정권이전 후 초대총통인 장개석의 본명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생애 두 세가지 이름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출생시의 본명, 성인이 된 후 사회적으로 쓰이는 이름인 자, 문인,학자, 관료들이 별도로 지어쓰는 호가 바로 그것들이다. 장개석은 공식적으로 자명을 주로 사용했고, 이것이 공식영문으로 쓰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주로 이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중정기념관은 1975년 장개석 사후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착공해 1980년에 완공되었다. 타이베이 중심에 위치해 있고, 규모도 상당해서 명실상부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중정기념관 2층 중앙홀에서는 매일 9시부터 한 시간 마다 근위병 교대식이 열린다. 중앙홀의 장개석 동상과 그 크기, 배치, 여기서 바라다 보이는 광장은 워싱턴D.C의 링컨 기념관을 연상시킨다.

관광객으로서는 흥미로운 이벤트인데 오래된 궁전의 전통을 보여주는 위병교대식도 아니고, 왕권 국가도 아닌데 뭔가 어색한 느낌이 있다.

장개석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언제까지 위병교대식이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행중에 마침 대만 총통선거가 있었다. 차이잉원이 한궈이 가오슝 시장을 이기고 역대 최다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고 민진당 정권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대만해협의 긴장은 계속 고조되는 중이다.

1947년 2월 27일. 담배노점상을 경찰과 단속반이 과잉단속하는 과정에서 노점상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주변상인들과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를 했고 이 과정에서 천원시라는 학생이 경찰의 총에 맞아 이틑날인 28일 결국 사망하게 된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당사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위군중이 직접 가해자와 동료경찰을 처단하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사태는 급격하게 폭력적으로 악화되었고 전국적인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발단으로 대만 원주민인 본성인과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인간의 갈등이 심각해졌고 심각한 치안부재 상황에 이르자 장개석은 본토의 군대를 대만으로 파견해서 무자비한 진압과 계엄을 실시하였고, 정권의 대만 이전 이후까지 이 계엄상황이 유지되면서 2.28은 언급조차 하면 안되는 금기어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피해 사망자만 2만 8천명이나 되고 비공식적으로는 그 피해자가 십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2월 28일만 되면 반복적으로 중정기념관 장개석 동상에 오물 투척 사건이 벌어진다고 한다.

대만은 일본 제국의 첫번째 식민지였다. 그들의 침탈은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대만 본성인들은 빠르게 황민화 되어갔다. 그 상황에서 국민당 정권의 대만 이전이 이루어졌다. 대만 본성인들은 또 다시 외부세력의 폭력적 탄압에 노출되고 말았다. 중국말 대신 일본어를 주로 썼던 본성인들은 쉽게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 정점을 찍은 사건이 2.28이다. 광복후 친일파들이 오히려 득세한 대한민국과는 구도가 다르다. 분단을 두고 적전 분열되는 양상은 비슷하나 역사 정치적 맥락의 차이가 있어서 직접 비교도 어렵다. 다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 정치적 폭압에 맞섰던 세력이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현실은 동일하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 하다고 하지만 만약 그들에게 2.28이, 우리에게 4.19가 없었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우리에게 친일은 너무나 당연한 배척의 대상인데 지금 대만인에게는 향수를 일으키는 근현대화의 역사이고, 대만 독립을 이끌어가는 정서적 배경이 된다. 민진당의 정책은 우리의 보수 세력과 통하고, 국민당은 우리의 진보 세력의 이해와 합응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면서도 민주주의와 역사발전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줄긋기는 다시 교차된다.


역사에 정의는 절대적인 가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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