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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다한석사 Aug 12. 2024

어린왕자 in SEOUL(#03풀밭을 그려줘요)

하얀 얼굴에 빛나는 노란 머리, 그리고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눈동자.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이상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 순간, 나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진짜 '경이로운 공포'라는 걸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말문이 막힌 나는, 겨우겨우 소리를 내뱉었다.               

     

“어으... 어으...”                    


그 아이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입술이 한 번 떨리더니, 마침내 말을 꺼냈다.         


“말을 못 하나 보네요. 큰일이에요. 양이 곧 죽을지도 몰라요.”                    


정신을 차리고, 그 아이를 빤히 쳐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하자, 비로소 내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이는 내가 말을 못 한다는 것은 상관없고 양의 생사만 중요했다.                    


“얘야,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니? 너는 누구니?”   

                 

머릿속에 이 아이는 어린 왕자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랴. 세상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가득하니까 눈앞에 진짜 어린 왕자가 나타났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 찰나에 수백 번 생각해 봐도 역시 놀랄 일이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부탁인데, 풀밭을 그려줘요.”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일단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노트북은 가지고 왔지만,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다행히 색연필도 챙겨 왔기에 제법 그럴듯한 풀밭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문득 마음이 바뀌어, 오래전 책에서 봤던 보아뱀 그림을 그렸다.        

            

아이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아냐! 아냐! 모자를 원한 게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건 풀밭이에요!”               

     

'모자'라는 말을 듣자 허무함이 밀려오면서 몸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숨이 차오르던 가슴도 점차 진정되었고, 그제야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일어날 수 없을 만큼 아파서 엎드린 채로 풀밭을 다시 그리자, 아이도 엎드려 내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안 돼요. 풀이 너무 작아서, 한 달도 안 돼 양이 다 먹어 치울 거예요. 다른 풀밭을 그려주세요.”                    

나는 다시 힘겹게 풀밭을 그렸다. 이번에는 풀을 더 풍성하게, 색깔도 다양하게 써서 그려봤지만, 아이는 여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이건 너무 까끌까끌해서 양이 못 먹어요.”     

“이건 금방 시들어버릴 거예요.”     

“이건 먹을 수 없는 풀이예요.”     

“이건 풀이 아니잖아요.”                    


아이의 계속되는 불만에 지친 나는, 몸을 뒤집어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양을 그려달라고 했잖아, 보여줘.”                    


그러자 아이는 품에서 그림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건 분명 내가 만화책에서 봤던, 양이 들어 있는 상자 그림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빨간 색연필을 집어 들고 태양을 그려주며 말했다.     

               

“상자 안에 있는 풀들은 계속 자라날 거야. 양이 아무리 먹어도 다시 자라날 거야.”         


아이는 그림을 빤히 보더니, 신나서 나에게 소리쳤다.                    


“벌써 풀이 자라났어요! 양이 너무 커져서 풀을 모조리 먹어 치워 버려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 없겠네요. 보세요! 양이 풀밭에서 신나게 뛰고 있어요!”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힘겹게 구석으로 몸을 옮겨 누웠다. 허리 통증이 밀려와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지만, 그저 아이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얘야, 너 때문에 내가 허리를 다쳐서 이제 일어날 수가 없어. 그러니 누워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줄래? 지금 허리가 너무 아파.”                    


아이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양이 곧 죽을 것 같아서 너무 급했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어린 왕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이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왕자 in SEOUL(#03풀을 그려줘요)어린왕자 in SEOUL(#03풀을 그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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