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번달도 마이너스
제목은 '나는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한다'라는 책을 따라한 건데, 내용은 아주 다르다. 책처럼 성공한 사업가 거나 혹은 파이어족이면 좋으련만 나에게는 로또 같은 이야기이고, 안 벌면 안 되는 만큼만 일하는 건데 실은 자랑이다. 바야흐로 자랑 없이 하루도 못 견디는 세상이 아니던가.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처럼 말이다.
12시간만 일해도 빚독촉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건 나에게는 큰 자랑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학자금대출을 갚고 마이너스통장을 메꾸느라 가계부가 피를 철철 흘렸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나는 통장이 0원을 유지하는 것에 대단히 만족 중이었다.
얼추 6-7년은 일했을 텐데 가용한 현금 잔고가 빵원이라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조금 비정상적이기는 하다.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문자메시지를 보낸 발신인은 한국장학재단이다. 학교에서 내라는 돈은 몽땅 거기서 빌려 썼으니, 8학기 치 원금과 이자에 관한 납입예정 혹은 독촉 문자는 한 달에 10개가 넘었다. 당시에는 '무한대+1=무한대'라고 생각했다. 서른 살의 내가 어찌어찌 감당하겠지? 하고 나를 너무 믿었는데, 사회 초년생의 월급은 짰고, 독촉은 매웠으며, 인생은 썼다. 저축이나 재테크는 고사하고 지연이자라도 안 내려고 발버둥 친 지난한 세월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스무 살부터 과외로 생계를 이어온 억척이인데, 집에서 주는 돈이 0원이었음에도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즐겁게 지낸 죄로 항상 쪼들리게 살았다. 왜 대체 나만 가난한지 대학 때도 대학원 때도 주변인들은 다들 부유했다. 약간은 억울했지만 티 나지 않게 나도 잘 살아야 하므로, 성수기 땐 하루에 서너 개씩 과외를 잡아놓고 빠듯하게 시간을 맞추려 지하철 환승구간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새벽 1시까지 과외를 하고 차가 끊기면 갈 수 있는 만큼은 걷다가 택시를 타곤 했다. 그래도 나는 비관하지 않았다. 가까운 미래에 늘 숨 쉴 구멍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통장으로 방학마다 여행을 다녔는데, 이게 나를 가난하지 않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객관적으로는 경제관념이 더럽게 없었지만, 다시 시간을 되돌린대도 나는 비슷하게 살았을 것 같다. 일 년에 한두 번 훌쩍 떠나 일상을 깡그리 잊지 않으면 자기 연민에 빠진 나를 건져내지 못했으리라.
어쨌거나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면 0원일 땐 괜찮았는데 이제 다시 익숙한 마이너스 표시가 보여서, 약간 긴장이 되는 요즘인 것.
맞벌이 부부의 돈관리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지만, 주말 부부를 오래 해온 우리는 아이를 낳으면서도 통장을 합치지 못하고 따로 관리하고 있다. 그의 보험료와 차량유지비, 통신비, 시부모님 용돈, 기타 등등 본인이 쓰는 것은 알아서 관리하고 월급의 절반을 생활비 명목으로 나에게 보낸다. 여기에 내 수입을 합쳐서 매달 가계를 굴리는 것인데, 뱅크샐러드가 분석해 주는 지출내역을 보면 이 항목을 더 아껴야겠다는 반성도 일부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저축을 위해서는 더 버는 게 맞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출산을 하며 1년을 쉬었는데, 그동안 남편한테 받은 돈을 쓰는 것이 아주 불편했다. 그가 가계부를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버니 아껴 쓰라 닦달한 적도 없지만 왜인지 친구 생일에 치킨 한 마리 보내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그리하여 작년 초에 일을 시작하며 월급이 찍혔을 때 이전과는 달리 굉장한 안정감이 생겼다. 다시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돈은 시간을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않은 나를 뿌듯하게 만든다. 그리고 경험에 투자하게 만들어 삶을 풍요롭게 한다.
파트타임으로 1년 정도 살아보니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이렇게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충분히 좋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돈이 더 필요한 삶이다. 과거의 내가 몇 달 후의 비행기표를 가슴속에 품고 살며 힘을 냈듯 개인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고, 그건 돈이 많이 든다. 명품이나 외제차는 아예 생각도 안 한다. 내일 죽는다면 가장 후회될 일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한동안 나는 ‘어디 어디를 안 가본 것’이라고 대답을 했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지금은 자식 덕분에 죽는다는 상상조차 무서워서 안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일생의 숙제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당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때를 기다리며 체력을 비축하고 여행자금을 모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삶의 모험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한다면 더 행복하고 더 돈이 많이 들 것이다. 철없던 20대의 나는 산와머니 노래를 흥얼거렸었으나, 지금의 나는 무엇보다 안정감을 중시한다. 이벤트처럼 맞이할 여행이나 깜짝 선물 같은 특별한 경험 외에도 평범한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축복이기에 우선은 살림을 잘 꾸려야 한다. 미풍에 흔들리지 않도록, 깊은 물이 필요하다. 깊은 물은 넉넉한 통장이겠지.
여름의 알래스카, 고래의 버블
티베트 카일라스와 마나사로바 호수
산티아고 순례길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남극 크루즈
몽골 고비 사막 레이스
스리랑카에서 고래와 수영하기
훈자마을
체팔루 - 이 광장은 내 거야!
무르만스크
이나리 호수
알티플라노 고원
밀포드 사운드
크레타섬
무스탕
판공초
페트라
갈라포구스
리유니옹
밴프, 레이크 호수
티티카카호수
에티오피아 활화산
터키 일주
쓰기만 해도 행복하다.
노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모르는 삶의 기술을 언젠가 통달할 수 있을까? 일을 더 하더라도 소진되지 않을 정신력과 체력이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효율과 능력치가 높은 소위 알파우먼이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될 자신도 없다. 그저 그 경계를 구분 짓지 않고 통으로 삶을 즐기고 싶다.
지나간 유행어이려나, 외않되?
앞서 언급한 ‘나는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한다’라는 책에 밑줄을 그어둔 문장을 소개하고 글을 마치겠다.
일을 위한 일이 되지 않도록 하며,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일만 한다.
회복기와 모험기(미니 은퇴기)를 인생 전반에 걸쳐 고르게 배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