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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리핵주먹 May 10. 2024

나는 두 살 배기로소이다

(나의 첫 어버이날을 기념하여)

나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3개월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


머리가 너무 커서 자연분만으로 나지 못하고 초록빛으로 가득한 수술방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들어본 바로는 명의의 집도하에 8분 만에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나를 받아준 의사 선생님은 이제 막 엄마 뱃속에서 나온 나를 꺼내 들고서는 엄마에게 말했다.


‘아기가 머리가 굉장히 크니 나중에 꼭 수영을 시키세요.’


우스갯소리였겠지만, 세상에 나온 기념으로 대차게 울어재끼기도 전에 의료인의 얼평을 듣다니, 몹시 심난했다.  


지독한 코로나 시대에 태어난 덕에 엄마 얼굴도 제대로 한 번 못 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신생아실로 올라갔다.


나의 아빠가 될 사람은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내가 내리는 엘리베이터 층에서 카메라를 3대나 대동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내 아빠는 나의 덕후가 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역시나 코로나의 여파로 하루에 딱 한 번, 엄마만 만날 수 있었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과 뿌연 유리창은 하루하루 포동해지는 내 용안을 뽐내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


나의 부모는 하루종일 신생아실에서 보내주는 내 사진을 기다렸다고 한다. 하루 한 번 있는 면회시간에서도 나는 대부분 쿨쿨 자고 있었는데, 가끔 깨어있을 땐 팬서비스로 재채기도 해주고, 한 번씩 웃어주기도 했다. 토실토실하고 네모진 내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쿨하게 키우겠다는 이전의 다짐을 다 허물고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갖다 바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내가 봐도 맛밤 봉지에서 나온 귀여운 밤톨같이 생겼으므로 이해하는 바다.


신생아실에서 4일의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나는 나의 부모를 만났다. 나를 인계해 주는 간호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아주 많이 먹고, 적게 주면 화를 많이 내니 모유수유가 힘들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기의 귀여움은 통통함이 아니던가?


나의 아빠는 바구니 카시트를 들고 나를 옮기는 예행연습까지 마쳤으며, 나를 태우고 시속 20km로 운전했다. 그는 조심성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화창하고 따뜻했던 5월 말, 두꺼운 이불에 둘둘 말려 나는 조리원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나의 엄마는 그간 삐뽀삐뽀 119라는 초보엄마를 위한 유튜브 채널을 섭렵하여 나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것저것 시험해 보았다. 그러다가도 내가 딸꾹질을 멈추기 않거나, 똥을 너무 많이 싸면 지체 없이 신생아실로 나를 옮겨 전문가의 손길에 맡기기도 하였다.


예행연습으로 조리원을 거쳤으나 한동안은 우리 세 가족에게 예정된 시련이 닥쳤다.


집에 오자마자 똥을 싸서 엉엉 울고 있는데, 아빠는 부스럭거리며 모빌을 연결해서 보라고 해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서툰 시작이었다.


나는 조리원에서 유니콘이라고 할 만큼 모범적인 아기였으나 집에 오자마자 잠을 거부하게 되었다. 경험이 많은 산후도우미께서도 나는 잘 안 자는 아이 같다고 하셔서 우리 엄마는 절망했다.


나의 부모는 온갖 육아서를 섭렵하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분석했다.

허나 나는 이론이 통하지 않는 아기였다.

엄마 아빠의 손길과 웃음에 나는 대부분 행복했으나 잘 때만큼은 매운맛이 되었다.


목청도 크고 아주아주 서럽게 울었는데도 종종 엄마는 나보다 더 크게 울기도 했다.


나의 부모는 아기방에 층간소음이 있는 것 같아 그렇다며 바쁜 와중에 내 방을 세 번이나 옮겼다. 아무 상관이 없었다.  결국에 시간이 약이라며 나의 엄마는 내 옆에서 쪽쪽이를 물려가며 속된 말로 ‘존버’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잠 못 드는 날에는 파도소리를 들으면 저항 없이 잠드는 나를 위해 엄마는 꽁꽁 싸매고 밖으로 나섰다. 나는 아기띠가 나의 무게를 못 견디고 아래로 쳐질 때까지 종종 아기띠에서 잠들었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을 거쳐,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잘 자고 기분 좋게 일어나서 아침 일찍 부모의 방으로 문안인사를 가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 이어나!’


하면 엄마는 왜 자꾸 엄마만 일으키냐고 툴툴거리며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세상 따뜻하게 나를 안아준다.


내가 문고리를 돌릴 때부터 내가 들어올 걸 알고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참 웃긴다.


본체 웃음이 많고 장난이 많은 부모의 슬하에서 나는 부모보다 더 한 개구쟁이가 되었다.


우리 부모는 나를 강아지, 종종 몬스터라고 부른다. 나 모르게 귓속말로 “쟤 왜 저래?”하는 얘기를 듣기도 하는데 그냥 모른 체해준다. 콩콩팥팥이다.


지금 나는 내 어린이집 가방을 찾아들고 신발을 신고 어린이집에 킥보드를 타고 등원하는 어엿한 어린이이다. 물론 지금도 종종 새벽에 엄마가 보고 싶으면 울기도 하고,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사실 눈물만 흘리는 게 아니라 오열이다. 나도 나를 잘 모른다. 이건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어린이집에 들어가지 않고 미끄럼틀을 타겠다며 완강히 버텼으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기라고 해서 울거나 우기면 다 될 줄 알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엄마는 나를 보내놓고 내 새 옷을 주문하고, 장난감을 정리해 주고, 내 간식을 만들어준다.


나의 아빠는 퇴근하고 득달같이 달려와서 이미 오링난 체력으로 나를 이리저리 날려주고 돌려준다.


내가 밤에 잠들기 전까지 우리 셋은 작은 불 하나를 켜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책을 잔뜩 읽는다. 나도 종종 몇 마디 거든다. 내가 그림을 기억해서 몇 마디 뱉으면 엄마 아빠는 천재라며 호들갑이다. 내가 잠든 후에 내 동영상을 보고, 시시티브이를 돌려보며 내 멋진 모습을 다시 기록하는걸 나는 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


세 살까지 효도하라는데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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