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다
누군가 그려놓은 선 안에서만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나를 위한다는 조건, 가족을 사회를 위해 선을 넘지말라는 그런 영역이 있다. 그 영역 밖을 한 발자국 내딛여보는 것. 글쓰기로 먼저 해보는 건 어떨까.
쥐띠인 둘째 언니는 쥐를 세상 제일 무서워했다. 어쩌면 쥐보다 더 무서웠던 건 빚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빚으로 인해 드리운 그 어둠이 더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무서웠다기보다는 몹시도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해방에 대한 갈망 같은 거.
둘째 언니는 독하게 공부해서 교대를 갔고 선생님이 되었지만, 몇 년 뒤 별안간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빚잔치를 했다. 안방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빙 둘러앉아 심각하게, 하지만 뭔가 이상스러운 유쾌함까지 있는 그런 분위에서 엄마 아빠가 이야기를 하던 그 안방의 분위기를 나는 기억한다. 분위기는 괜찮았다.
유쾌하기까지 했다. 아빠는 마치 물건을 사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흥정했다. 빚쟁이들 역시 이 징글징글한 도망자들을 더 이상 좇지 않아도 되기에 흔쾌히 흥정에 합의했다. 이자 없이 원금만 갚기로.
그렇게 우리는 빚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갈 때 누가 쫓아오는지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일상 옮겨 다니던 이사도 이제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학으로 생활기록부를 들고 쭈뼛거리며 낯선 학교에 혼자 들어서지 않아도 되었다.
둘째 언니는 일곱 살 때부터 아기였던 나를 업었다. 아기를 업고 친구들과 놀면서 내가 울면 언니는 가게로 가서 젖을 먹였다. 한 살 아기를 업어 키우던 일곱 살 꼬마의 그 책임감은 한 가정에 태양을 가져다주었다.
때때로 아빠 엄마 보다 더 나은 자식이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쓰기 전에는 부모보다 나은 자식이 있다는 말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는데, 쓰다보니 손가락 끝에서 풀려 나왔다. 선을 넘는 것처럼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대체로 선을 넘기 좋은 상대는 가족이며 그중 부모님인데, 글로 다 쓰지 못한 내용을 말할 기회가 대체로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돌아가신 부모님은 말하지 못하는 그 어떤 영역까지도 이해하실 것이기에 그렇다. 그들은 신의 영역에 있을 테니까.
글쓰기는 매번 선을 넘는 행위이다. 작은 그릇 하나를 깨뜨린 행위이다. 그래도 아무도 다치지 않게, 글 속의 대상이 자신인 줄 모르게 깜쪽같이 속일 필요는 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세우는 문장은 무엇인가? 문장으로 선을 넘을 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