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성장하는 길에 사랑에 빠지다
'나'와 '영혼'의 대화는 계속된다. 계속 길을 간다. 사슬 갑옷을 겉옷 속에 입고 간다. 그는 이제 뱀들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들의 비밀까지도 알게 되었다. 무지갯빛의 큰 뱀을 만난 그는 필레몬에게서 배운 마법으로 피리 연주를 한다. 뱀을 향해 "나의 영혼", "나의 여동생"이라고 부르고, 뱀은 그의 영혼이 되어 대화를 나눈다.
'나'는 '비애감'과 '진부함'이 그리 먼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부글부글 단지가 끓고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모든 인간성의 결합'이다. 마녀의 솥이 늘 요리와 약물을 만들기 위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의 그릇은 끓고 있다. '나'는 스스로가 손님이 되고 또 동시에 요리가 되는 것이 무섭고도 달콤한 생각이라고 말한다. '나'는 놀라움을 표현한다.
"얼마나 신성하고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 뜨겁고 차가운 모든 것이 서로를 향해 흐르고 있으니! 광기와 이성이 서로 결혼하길 원하고 있어. 새끼 양과 늑대가 나란히 평화롭게 놀고 있어. 모든 긍정과 부정이 함께하고 있어." (330쪽)
상반된 것들의 통합에 대해 감탄하는 '나'의 말을 들은 영혼은 감상적이고 철학적인 표현이라고 핀잔을 주며 더 적합한 말을 제시한다.
"네가 벌레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성장하는 길에 사랑에 빠졌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잖아."(330쪽)
'슬픔의 아이'라는 뜻의 트리스탄은 콘월의 마크 왕의 조카이자 기사였다. 왕은 아일랜드의 공주 이졸데와 결혼하기 위해 조카를 보낸다. 공주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트리스탄은 마법의 와인 즉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만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융은, 사랑 '하다'와 '빠지다'를 엄격하게 구별한다) 그들은 선택이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졌다. 이졸데는 왕과 결혼하지만 그 후에도 트리스탄과 몰래 계속 사랑을 이어간다. 사랑은 기쁨이고 고통이 된다.
"사랑만 마신 게 아니라 사랑과 죽음을 칵테일 해서 마신 거야."
사랑의 묘약에 취한 두 남녀는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 황홀경에 도취되어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데, 이 세계는 인간의 사랑과 천상의 사랑이 연금술사의 용기 안에서 혼합된 상태이다.
("로버트 존슨이 쓴 <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 심리학적 이해 We> 72쪽)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기쁨과 고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융이 말하는 개성화 과정 즉 자기실현 과정은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이다. 외부의 타자로서의 남성/여성과의 진정한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내면의 여성성과 남성성의 통합이다. 그런데 융은 현대인은 감성과 느낌, 수용과 관계성이라는 여성성의 특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내면 의미에서 '벌레'는 '의식을 하기 전의 상태', 무의식적이며 본능적인 상태의 자아일 것이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성장하는 과정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자아를 초월한 영혼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랑을 말하는 듯하다.
영혼이 된 뱀이 순간, 융의 심장을 물려 들었으나 갑옷 덕분에 오히려 뱀의 이빨이 부러진다. 융은 말한다. "사랑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뱀 같은 것이 거주"하고 있으며, "인간성 그 너머에 있는 것은 뱀과 새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332쪽)라고.
융은, 자신의 영혼이 뱀인 것처럼 행동한 것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가져본 뒤 "나의 영혼이 한 마리 뱀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332쪽)라고 말한다. (이 뱀은 잠시 뒤 새로 변해 날아가긴 한다.) 자신의 영혼이 한 마리 뱀이었던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과연 나의 영혼은 무엇일까? 무엇과 유사할까?
융은 영혼에게, 네 길을 벗어나지 말고 불을 가져다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영혼은 "내려갔다가 올려다 준다"
올라온 것은, 신의 옥좌와 신성한 삼위일체와 천국의 모든 것, 그리고 사탄. 사탄은 '나'에게 조언을 해준답시고, 쇄신은 해로우니 멈추라고, 구분과 불화가 없는 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다고 유혹한다. 그러자 '나'는 사탄이 제공하는 삶은 거품이고 성난 파도만 일으킬 뿐이라면서 가르치려 드는 사탄을 보내준다. 사탄은 두더지처럼 숨어들고, 신성한 상징들은 천국으로 오른다.
'나'는 적절한 것들을 올려다 준 뱀에게 감사한다. 사탄과 신성한 것들을 올려다 준 영혼. 우리는 살다 보면, 항상 좋은 것만 있지 않고, 항상 나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내 앞에 놓은 어떤 것들이 세속적인 욕망이든 신성한 영성이든 그 모든 것이 내 영혼이 가져다준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앞의 욕망과 영성에서 대화하고 배우면서 놓아주면 각자 자기 자리로 가는 해방의 시간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