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후에 알게 되는 것
사실 나는 결혼 초반에 ‘좋은 며느리는 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다. 좋은 며느리가 되려다가 나를 잃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지키면서 동시에 서로 건강한 관계를 맺는 방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심만 섰을 뿐, 방법을 찾고 실행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 좋은 며느리가 되려고 애쓰는 나를 발견했다.
‘좋은 며느리’의 문제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다는 데 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상대를 먼저 배려하느라 자신을 배려하기 어려워진다. 자기 생각과 의견 때문에 상대 마음이 불편해질까 봐 신경이 쓰인다. 매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다시 삼킬 때가 많아진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어느새 자신의 목소리는 없어진다. 잇따라 소중한 나만의 색깔·매력·생기까지 잃어간다.
여자들이 꿈속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신발·가방 등을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꾼다. 현실에서는 무언가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서든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모르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깨닫기 어렵다. 그러므로 스스로 무엇을 잃었는지 묻고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내버려두다가는 점차 자신의 소중한 것, 나아가 자기 전체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가에 처음 들어갈 때 두려움이 엄습했다. 친정어머니는 결혼을 앞둔 딸에게 당신이 살아왔던 경험을 들려주며 며느리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 번 말씀하셨다.
“시부모님이 좋으신 분들이라 ‘너만 잘한다면’ 사랑받고 살 게다.”
친정어머니는 성격이 괴팍한 시아버지(할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해 헌신했다고 한다. 시아버지 말년에는 중풍으로 쓰러진 그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똥 묻은 빨래를 들고 산 아래 물가까지 가서 빨아와야 했다. 쌀이 귀하던 시절에 어머니 자신은 못 먹어도 시아버지 밥은 꼭 챙겨드렸다. 이를 눈치챈 시아버지가 반 공기를 꼭 남겼고, 그 남은 밥으로 어린 아들과 조카를 챙겨주었다. 어머니는 눌은밥에 물을 부어 배를 채웠다고 한다. 나중에 시아버지는 “우리 며느리 같은 사람 없다”라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당신 며느리를 칭찬하고, 며느리 이야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셨다고 한다. 말 그대로 희생으로 얻어낸 인정이었다.
어머니는 ‘시부모 사랑은 며느리 하기 나름’이라고 강조하셨다. 그 ‘너만 잘한다면’이라는 말은 자신처럼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라는 의미였다. 나는 희생이 삶의 정답이자 기준인 어머니처럼 살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나도 시가에서 사랑받고 존재감 있는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은 내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했다.
생각해보면 무엇을 위한 희생이란 말인가? 자신을 던진 희생으로 얻어낸 인정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나마 어머니의 희생에는 의미가 있었다. 중풍인 시아버지를 돌보고, 키워야 할 조카와 아들이 있었다. 내 결혼에는 그 정도 희생은 필요하지 않았다. 돌보아야 할 존재도 없었고 오히려 시부모가 며느리인 나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도록 배려하고 살펴주는 처지였다. 아무도 내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내 뿌리에는 어머니의 희생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그냥 필요하지 않은 희생에 스스로 뛰어든 것이다. 며느리 역할에 두 팔을 내어주고 시가의 일에 발 벗고 우선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내어줌으로써 나 자신을 위해 써야 할 두 팔부터 두 다리, 행동할 몸까지 없어졌다. 자신을 모두 내어준 피폐한 엄마로서 삶은 아이들도 안녕하기 어렵게 한다.
‘좋은 며느리’는 ‘좋은 아내’로 이어졌다. 남편에게도 ‘당신 같은 사람 없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나 보다. 남편의 전적인 사랑을 기대했다. 이런 마음은 남편 앞에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막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사랑받기 위해 애쓸수록 남편의 사랑은 멀어진다는 것이다. 사랑을 잃을까 봐 참아서는 안 되는 선까지도 참고 사는 어리석은 삶이 계속되었다.
자신을 다 내어주는 여자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마음은 텅 비어버린 곳간과 같았다. 희생은 누구에게도 혜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좋은 여자가 되려다가 잃어버린 내 것을 회복해야 했다. 회복은 잃어버린 세월만큼이나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하나씩 찾아가면서 이제는 나 자신을 지켜낼 것이다.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린 후에야 알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