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통장
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 쿠폰을 감정 통장으로도 비유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레이 쿠폰이라는 인출과 골드 쿠폰이라는 예금을 반복하며 산다. 만약 부부 관계 통장에 예금 없이 인출만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의 결혼 생활에서 가장 큰 인출은 남편의 외도였다. 예상치 못한 큰 인출에 남편을 향한 신뢰는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남편의 사랑이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갔으니, 우리의 사랑은 끝났다고 여겼다. 충격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만 있다면 다시 새롭게 출발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당시에 남편은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굳게 약속했다. 순진하게도 정말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줄 알았다. 큰 상처와 고통을 받았지만 우리의 결혼이라는 통장을 없애지는 않겠다는 뜻은 같았기에 스스로 감내했다. 그러나 1, 2년이 지나 그때보다 더 큰 마이너스 인출이 돌아왔다. 두 번째 인출의 데미지는 오래갔다. 남편도 여자도 관계를 곧바로 청산하지 못해서 2, 3년이나 지속되었다. 이 비바람이 빨리 사라지기만을 꾹꾹 견디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삶은 연습이 없으므로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실수가 반복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다. 게다가 외도는 치명적이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라는 사과 한마디로 끝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방법을 적극 찾아야 했다. 한번 발생했던 일이라면 특정 조건이 갖추어지면 언제든 또다시 일어나는 것이 마음의 특성이라고 한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할 수 있고, 거짓말했던 사람은 거듭 거짓말할 수 있으며, 외도했던 사람은 다시 외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굳건한 다짐 같은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 행동은 무의식에 저장된 마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계속 의심의 눈초리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원래 그런 존재’ 임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해결책은 시작된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과 문제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어떤 일이든 우연히 일어나는 법은 없다는 ‘인과의 법칙’을 이야기한다. 사건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반복될 조건을 찾아 없애고 다시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자세가 중요하다. 원인을 알아야만 다른 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외도 사건은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문제의 원인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에게는 가장 아픈 상처였기 때문에 들여다보는 일 자체가 괴로웠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건드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 일을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계기는 《며느리 사표》를 쓰면서였다. 이 책은 나의 결혼 생활에 대한 기록으로, 다시는 나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썼다. 더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고 그 세월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마치 피해자의 진술처럼, 울분과 분노를 풀어냈다. 남편과 시가와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고통과 상처를 받았는지 낱낱이 밝혀내고자 했다. 초고를 단숨에 마쳤다. 그리고 1여 년의 퇴고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겪었던 내용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해서 다듬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치유 과정과도 같았다. 글을 다듬을 때마다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까.
이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분노와 후회, 상처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졌다. 울분이 가라앉고 분노가 탄식으로 바뀌며 상처가 아물어갔다. 마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점차 굴곡이 잦아지며 평온해지는 경험이라고 할까.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에서 벗어나 양쪽 모두를 보는 균형 잡힌 시선이 생겼다. 나 자신과 사건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나를 집중해서 들여다보는 계기였던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고통은 일차적으로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는 불행을 남편이나 시가 탓만으로 돌리면 안 되었다. 불행을 푸는 열쇠는 내가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엄밀하게 보면, 삶을 끌어가고 책임지는 사람은 온전히 나 자신이다. 그러나 나는 온 존재를 남편에게 내맡긴 채 그저 가만있었고, 남편은 그 모든 부담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했다. 결혼 초반에는 부부 갈등의 원인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했다. ‘최선을 다하는 나는 옳고, 이기적으로 사는 당신은 틀렸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남편은 공격하고 쪼아대는 나의 태도를 피해 집 밖에서 위안을 얻으려 했는지 모른다.
길고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 뒤늦게 돌아보니, 우리 부부는 덜 자란 어른이었다. 남편과 나는 쌍둥이처럼 모습이 같았다. 자기밖에 모르는 남편이 내게 드러나게 상처를 주었다면 남편밖에 몰랐던 나는 드러나지 않게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남편 역시 스스로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외도한 당사자 또한 결국 배우자에게 느끼는 죄책감으로 괴롭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잘못은 이미 일어나버렸고, 되돌릴 수 없다. 잘못과 고통을 곱씹다 보면, 상처에서 상처로, 상대를 탓하고 원망하고 파괴해버리고 싶은 전쟁만 남는다.
외도한 남편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 잘못에 책임을 지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저 남편이란 존재와 남편의 잘못을 구분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칫 남편 전체를 싸잡아 ‘나쁜 놈’이라고 규정한다면 부부로서 회복될 가능성은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외도를 했지만 남편의 다른 좋은 점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부부의 회복은 그 지점에서 시작될 수 있다. 잘못 하나를 그 사람의 존재 전체와 동일시해버린다면 부부에게 희망은 없다. 부부는 여전히 서로의 애정과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마저 잃었다면 그때는 이혼을 택해야 할 것이다.
연애할 때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상대를 위해 죽을 수도 있지만,
결혼하면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관계가 또 부부다.
애쓰며 가꾸어온 가정을 순식간에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 마음은 마치 크리스털 잔과도 같아서 아주 미세한 감정에도 자잘한 균열이 생기며 쉽게 깨진다. 자신 안에 누적된 분노가 폭탄이 되어, ‘상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면 같이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터져버리기도 한다. 한 가정이 깨지는 것은 쉽지만, 다시 회복하기는 무척이나 어렵고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때 부부의 관계 통장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평소에 서로에게 예금을 많이 해두었다면 살아가며 저지르는 감정 폭발과 실수, 잘못으로 인해 생긴 인출에도 관계가 쉽게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에 예금이 될 만한 행동을 수시로 적립해놓으면 늘어난 예금과 더불어 신뢰감이 이자처럼 쌓여 출금을 만회할 여지가 생긴다.
우리 부부의 예금 통장이 거듭 파산할 만한 인출이 있었던 만큼, 남편과의 신뢰는 회복되기 어렵다고 여겼다. 그러나 남편은 지난 8년 동안 꾸준히 예금을 지속해오고 있다. 깨졌다고 생각했던 신뢰감이 조금씩 회복되는 중이다. 어느덧 마이너스 통장에서 플러스로 바뀌어가고 있다. 아직 든든할 정도로 쌓이지는 않았으나 조금씩 늘어가고 있음이 느껴진다. 우리의 통장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서로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통장 관리는 계속될 것이다. 부부 관계에서 예금은 자주, 인출은 가능한 줄여야 한다. 그것이 신뢰를 쌓으며 마음 부자로 살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