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주 May 13. 2020

8. '생각'만으로는 무엇도 손에 쥘 수 없다

행복은 신의 은총이 아니라 내 두 손으로 움켜쥐는 것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누구도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예전의 나는 행복이란 신이 축복으로 내려주는 선물이라 여기고 신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면서도 이를 위해 스스로 행동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움켜잡아야만 원하는 바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8년 전에 이혼을 결심했을 때, 가장 고무되었던 사실은 더는 며느리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엄마 역할도 졸업하고 아내·주부 역할에서도 자유로워졌는데 명절 앞에서 ‘며느리 역할’은 그대로였다. 며느리 되려고 결혼한 것도 아닌데, 그 역할이 제일 큰 부담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며느리 역할을 ‘오래 했으니까 이제 그만두어도 된다’라고 하지 않는다. 저절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만두고 싶다면 직접 그만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며느리 역할을 계속할지 내려놓을지 여부를 스스로 선택하고 싶었다. 내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니 양어깨에 무겁게 올려두었던 쇳덩이를 내려놓는 듯 가벼워지고 용기가 솟았다.


여러 가지 역할에 매이다 보면 스스로 행복해지기 어렵다. 예전에 부모교육 강의를 할 때 만난 여성들은, 자신은 행복하지 않아도 아이들만은 행복하기를 바랐다(그래서 부모교육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행복한 아이로 키우기 위해 강의도 듣고 육아 서적도 읽으며 노력하지만, 애쓰는 것에 비해 아이들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엄마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된 여성들은 아이를 비롯한 가족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참고 순응하며 사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자신이 먼저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현실에서 실천하지 못했다.


가족은 모빌처럼 연결된 존재다. 모빌의 줄 하나를 당기면 나머지도 흔들리는 것처럼, 며느리·엄마·아내가 흔들리면 가족 모두가 흔들린다. 한 사람이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나머지 가족이 행복할 수 없다. 며느리로서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남편의 부당하고 폭력적인 행동에 참아주고, 열심히 아이들에게 헌신한다고 해서 남편과 아이들이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편안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안함은 행복이 아니다. 


자신의 부모님은 어떤가? 행복해 보였던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자신도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 스스로 행복할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자식들에게 애쓰지 않아도 서로 평화로울 것이다. 반대로 부모가 행복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행복하지 않을 개연성이 크다. 행복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행복에 대한 환상만 커질 수 있다. 행복이란 어떠해야 한다는 큰 그림만 그려놓고, 그림과 다른 자신의 모습 앞에 고통스러워할지도 모른다. 


대학생 1학년인 미숙 씨도 그러했다. 미숙 씨는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다섯쯤 낳고 행복한 아내이자 엄마로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기 이른 스무 살에 이런 꿈을 꾸다니 의아했다. 미숙 씨에게 어머니·아버지는 행복하시냐고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집안에서 횡포를 부려 어머니를 괴롭혔고, 외도가 빈번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 직장에 오래 적응하지 못했다. 한두 달 만에 회사에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결국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집안의 생계는 어머니가 장사해 번 돈으로 꾸렸다. 아버지는 사업비 명목으로 어머니가 일하는 가게를 담보로 대출받는 일이 잦았다. 빚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났을 때 부모는 이혼했다. 가게에 담보 빚이 잡힌 어머니는 이혼했음에도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그 빚을 갚았다. 더 복장 터지는 일은 여전히 남편과 시가 식구들은 어머니 가게를 제집 드나들 듯하며 어머니를 종 부리듯 대한다고 했다. 


미숙 씨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모의 사이좋고 행복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단다. 미숙 씨의 꿈이 빨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일이었던 이유는 어쩌면 부모의 불화에 지칠 대로 지쳐 자신만은 다르게 살고 싶다는, 다르게 살리라는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영화 〈마더!〉에서 아버지뻘 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여자(제니퍼 로렌스)는, 화재로 타버린 저택을 ‘파라다이스 같은 집’으로 수리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이 집을 구경하던 여자(미셸 파이터)가 “아예 집을 싹 다 허물고 새로 하지 그랬느냐”라고 물으니 여자는 “여기는 남편의 집”이라고 대답한다. 집수리 정도는 가능하지만 아예 전체를 다 허물고 새로 시작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방문한 여자는 멋지게 만든 이 집은 그저 배경일뿐이라고 말한다. 남편 집에 사는 여자는 자신이 파라다이스 같은 집을 짓고, 남편은 시인으로서 완벽한 시를 창작한다면 둘은 행복하리라 생각한다. 마치 미숙 씨가 결혼해서 아이를 많이 낳고 살면 행복하리라 여기듯이 말이다. 그러나 여자의 생각과 달리 집은 다시 잿더미로 돌아가고 그 잿더미는 반복된다.


‘어떻게 되겠지!’ 또는 ‘나는 반드시 우리 부모와 다르게 살 거야’라는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막연한 생각은 결혼식이 끝나는 순간 한 달 정도만 살아보면 이내 잿더미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경험해 보니 알겠다. 그것은 그저 환상이고 껍데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부모와는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 결혼 안에서 살 부부의 진짜 알맹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불에 타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숙 씨의 결혼에 대한 생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행복한 결혼’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폐허가 된 부모의 불행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부모를 불행하게 했던 삶의 방식을 아예 뿌리까지 허물고, 자신의 삶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잿더미 같던 부모의 삶이 자신의 결혼 생활에서도 반복될지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신의 은총처럼 오지 않는다.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키아누 리브스)처럼, 빨간 약과 파란 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행복해질 거야’라는 막연한 환상이 파란 약, 원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겨 직접 움켜쥐어야 하는 현실이 빨간약이다. 스스로에게 매일 “어떤 약을 먹을래?”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아야 무엇을 버리고 또 선택할지 가늠할 수 있다. 그 선택에 따라 삶은 우리에게 다른 문을 열어줄 것이다.           



이전 07화 7. 돈뿐 아니라, 관계에도 저축이 필요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