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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주 May 18. 2020

10. 빨리 잊어야 할 나쁜 일이란 없다

나쁜 일에도 축하가 있고 좋은 일에도 애도가 있다

      

1년 정도 혼자 살았을 때 이야기다. 24시간이 오롯이 내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잠시 해방감을 느꼈지만, 막상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다. 고민하다가, 미루기만 하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이후 힘들 때마다 내 안에서 질문들이 수없이 일어났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도대체 내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 할지 복잡하고 어렵기만 했다. 처리해야 하는 일들에 쫓겨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깊이 집중하지는 못했다. 나만의 시간이 온전히 주어졌을 때 비로소 정신없이 살아온 결혼 생활 전체를 돌아보고 싶어 졌다.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덮어둔 상처들이 많았고, 어수선한 실타래처럼 꼬인 괴로운 일을 들여다보기가 고통스러웠다. 고달팠던 과거를 빨리 잊고, 앞으로 살아갈 좋은 일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려면 먼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아야 했다. 불행했던 과거를 잊으면 그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역사학자들의 경고는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고 여겼다. 


영화 〈내가 잠들기 전에〉에서 크리스틴(니콜 키드먼)은 죽을 뻔한 폭행을 당한 이후 기억을 상실한다. 매일 밤, 자고 일어나면 그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다. 그는 영상 일기에 녹음하면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마침내 자신을 그렇게 만든 범인을 잡고, 진짜 가족을 만나면서 그는 결심한다.

“앞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을 빼앗기지 않겠어!”


크리스틴처럼 나도 살아오며 마주하기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다시는 나를 잃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문제는 나 자신에 관한 기억이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사라진다는 점이다. 27년이나 되는 결혼 생활인데, 막상 쓰려고 보니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느낌이었다. 백지를 앞에 두면 이내 기억상실을 겪듯이 멍해졌다. 처음에는 생각나는 대로 순서 없이 썼다. 그러자 점차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결과적으로 당시에 주어진 시간은 나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기록함으로써 과거의 사건들을 재경험했다. 겪었던 내용을 수십 번씩 반복해서 다듬는 전 과정은 치유 작업과도 같았다. 게다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에서 벗어나 서로의 입장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선이 생겼다. 나 자신과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니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게 일어난 일들이 남편과 시가만의 잘못인가? 나는 잘못한 점 없이 당하기만 했을까? 어쩌면 그 일이 일어나도록 나도 모르게 기여한 바는 없었을까?’


이전까지는 주어진 일들에 충실하고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준 친정어머니, 며느리 역할만을 기대했다고 여긴 시가와 시부모, 이기적인 남편 탓만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진짜 범인, 힘들고 고달팠던 내 삶의 모든 원인은 나 자신이었다. 순순히 세상이 말하는 괜찮은 여자가 되려면 자신을 죽이라는 말을 따랐다. 좋은 여자가 되려면 나 자신에게 가장 나쁜 존재가 되어야 했다.


더 중요한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흔히 좋은 일만 기억하자고, 나쁜 일은 다 잊고 살자고 말한다. 문제는 나쁜 일들을 다 지워버리고 나면 그다지 기억할 만한 일들이 없다는 데 있다. 내게는 살아온 대부분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뿐이었다. 그렇다면 내 삶은 다 어디로 사라져야 한다는 말인가? 다시 살펴보아야 했다. 나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 정말 나쁘기만 한가? ‘나쁜 일’을 끄집어냈더니, 그것의 진짜 의미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빨리 잊어야 할 나쁜 일이란 없었다.


비폭력 대화에서는 축하와 애도를 말한다. 모든 일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좋다고 하는 일에도 애도할 부분이 존재하고, 나쁘다고 여기는 일에도 축하할 일이 생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남편의 외도는 최악의 나쁜 일이었다.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애도해야 할 사건인 것만은 분명한데, 이 안에도 축하할 일이 있을까? 


고백하자면 축하할 일이 있었다. 남편의 외도는 충격이었지만, 그 덕분에 시가에서 분가할 수 있었다. ‘분가는 없다’는 남편의 강경한 태도에 외도라는 변수가 들이닥치면서 협상할 여지가 생겼다. 평생을 한집에서 같이 살리라 여긴 시부모에게도 이 카드를 빌미로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사실상 외도는 시가로부터 빠져나오는 축하의 메시지였다. 또 다른 축하도 있었다. 남편에게 더는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고히 깨달았다. 그 당시에는 애도할 일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사건이 내가 스스로 주인으로 살아가는 시발점이 되어주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로서 나약하게 안주하려고만 했을 것이다. 두 번의 외도는 더는 남편에게 기댈 수 없음을 명백하게 인식시켜주었다.


서른 초반에 병에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질병 자체는 애도할 일이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감사한 일을 가져다주었다. 스스로 돌보지 않던 건강을 챙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 병이 아니었다면 ‘나는 원래 약해’라고 생각하며 평생 골골거리고 살아왔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살이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세상에 좋다고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나쁜 일일 수 있고, 나쁘다고 여기는 일이 좋은 쪽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러니 무엇을 좋은 일, 나쁜 일이라고 분별하고 ‘싫다’, ‘좋다’ 한정할 일이 아니다. 그저 다 살아보고 나서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살아 보니 나에게 행복으로 안내해준 초대장은 대부분 고통에서 온 것이었다. 기적은 더욱 그러했다. 죽을 각오로 내밀었던 ‘며느리 사표’ 한 장이 시가 전체에 변화를 가져왔으니까.


더럽다고 취급받는 강아지똥에서 아름다운 민들레가 피어난다. 농부들은 인분이 가장 좋은 퇴비임을 안다. 빨리 잊어버리려 했던 나쁜 일들은 훌륭한 퇴비가 되어 아름다운 진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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