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장모님의 여든일곱 번째 생신이었다. 장소는 얼마 전 장인의 생신 때도 찾았던 송파의 어느 이름난 한식당. 요즘 식당들이 대개 그러하듯, 그곳의 음식들 역시 정갈한 매무새 속에 적당한 감칠맛과 설탕의 달콤함을 숨기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맛을 대번에 사로잡는 그 '요즘 맛'이 특별함 없이 장모님의 생신상에도 올랐다.
예약 시각보다 한두 시간 일찍 처가에 들렀다. 지난 추석 이후로 처음 뵙는 사위가 반가우셨는지, 장모님과 장인께선 그간 쌓인 궁금증을 보따리 풀 듯 풀어놓으셨다. 아내는 병원 동행이니 뭐니 해서 자주 드나들었다지만, 나는 참으로 오랜만의 문안이었다. 노인의 질문 틈새로 우리네 사는 이야기가 오고 가능 동안, 나는 얼마 전 구입 하셨다는 김치냉장고를 살폈다. 너무 과한 냉기 탓에 내용물을 얼리고 있는 김치냉장고 온도를 조정해 놓았다. 맏사위가 하는 일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지만, 이런 사소한 일이 노인들에겐 사위의 손길을 느끼는 귀한 정이 되기도 한다.
여든일곱. 요즘이야 백세 시대니 뭐니 해서 예전만큼 놀라운 숫자는 아니라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 결코 가벼운 세월이 아니다. 내 아버님,어머님만 해도 환갑이며 진갑을 일가친척을 다 모시고 이런저런 잔치 음식을 마련해서 떠들썩하도록 치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장모님의 여든일곱 생신을 처남네와 우리, 단 두 가족이 모여 한 끼 식사로 갈음한다. 이 간편함이 바쁜 현대인의 미덕인 줄은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편리함 뒤로 소중한 무언가를 내팽개치고 있다는 부채감을 지울 수 없다.
이 글을 쓰기 위해 AI에게 물어보는 중에 망구(望九)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망구(望九)'라는 말이 참으로 귀한 단어인데, 그 뜻이 크게 변질되어 버렸다. 망구(望九)는 아흔 살을 향해 가는 장수를 축복하며 조상들이 부르던 단어인데, 그 살가운 이름이 어쩌다 오늘날 노파를 비하하는 '할망구'라는 비속어로 전락했는지 모를 일이다. 귀한 가치가 천박한 껍데기로 바뀌어버린 그 말의 운명이, 어쩌면 경륜의 가치가 바닥으로 떨어진 우리네 세태를 닮은 것 같아 입맛이 썼다.
그 씁쓸함의 정점은 고3인 처조카의 등장에서 왔다. 일요일임에도 학원에 갇혀 있다가, 엄마 차에 실려 식당으로 불려 온 아이. 할머니의 생신 축하 저녁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독서실로 돌아가야 하는 그 가련한 모습. 대한민국 현제를 살아가는 고3이라는 가혹한 이름표 아래, 할머니의 여든일곱 해 세월을 마음껏 축하할 마음의 여백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발전'의 정체인가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자문해본다. "우리는 정말 잘살고 있는 것일까?"
훗날 내가 여든일곱의 생일을 맞이했을 때, 나의 아이는 어떤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 있을까. 혹은 앉아 있어 주기라도 할까. 삶은 더 편리해지고 음식은 더 달콤해졌으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던 그 눅진하고 끈끈한 정(情)의 농도는 자꾸만 묽어져 간다. 망구를 바라보는 장모님의 생신날, 나는 축하의 인사를 건네면서도 정작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의 가슴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