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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Oct 05. 2020

김밥과 부탄가스

단편소설


 친구 놈의 자취방은 음침하고도 우울했다. 고대 상형문자 같은 문형의 벽지는 오래될 대로 오래되어서 더 이상 벽지이기를 포기한 듯했다. 방안을 감도는 냄새마저도 하수구의 냄새가 더 나을 법했다.


 겨울에도 이지경이니 여름에는 생각만 해도 코 안이 몽땅 썩을 것만 같았다. 방안에는 어제인지 그제 인지도 모를, 먹다 남은 참치가 삼분의 일 가량 말라 붙어있는 참치 캔이 밥상 위에 죽은 고생물처럼 놓여있었다.


 가난한 자취생 주제에 참치 캔에 참치가 말라붙어 있다는 것은 말라붙기 전에 자취방을 빠져나갔다는 말이고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참치 캔 덕분인지 몰라도 자취방이 인간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제외하면 방안의 모습은 참담했다. 무엇보다 밖에서 불어대는, 살을 에는 듯 한 바람의 추운 날씨보다 더 추운 방 안의 온도가 공포영화 속으로 들어와 있는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공포영화 속의 고스트들도 이 방에서는 추워서 제대로 무서운 얼굴을 하지 못 할 것이다. 이 녀석은 어째서 이렇게도 먼 곳의 외딴곳에서 자취를 하는 것일까.


 방금 자취방에 들어오면서 주인에게 전해 들은 말이지만 주말에는 녀석이 자취방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위를 피해 어딘가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자취방의 문단속은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주말에는 죽 없을 거야.라는 말을 자취방의 주인에게 들었다. 여긴 겨울이 되면 아주 춥제.라는 말을 남기고 주인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 녀석을 놀래 줄 심상으로 연락도 하지 않고 왔다. 밤에 막차를 타고 온 것이다. 덕분에 오늘 밤은 이 냄새나고 더럽고 추운 자취방에서 보내야 했다. 자취방의 문턱에서 보이는 풍경은 자취방 옆에 붙어있는 불 꺼진 다른 집들이 몇 채 보일 뿐이었다. 불 꺼진 동네(동네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마치 70년대 초 통영의 어느 마을의 모습이나 영화를 위해 일부러 만들어 놓은 세트장 같았다.


 자취방은 연탄으로 방의 불을 지펴야 했다. 우리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부엌의 모서리에 남아있는 번개탄 세 장을 다 써가면서도 뻔 한 결말처럼 연탄에 불을 붙이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꼼짝없이 우리는 살을 도려내는 듯 한 추운, 그 녀석의 방 안에서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나와 은숙 그리고 진이였다. 은숙과 진이는 여자다.     


 그 녀석과 우리는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죽 함께 지내면서 자라온 친구사이였다. 그 녀석이 성인이 되고 돈을 번다며 버스를 타고 세 시간이나 떨어진 외딴곳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하러 떠났다. 그리고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자취를 했다.  


 학비를 벌어볼 요량이라고 소주를 마시며 우리들에게 말을 했었다. 작은 마을의 자취방이라지만 이건 정말로 표현하기 힘든 숙명적인 숙제를 짊어진 방과 마을의 모습이었다. 농밀한 충격이 가득한 풍경이었다. 그 녀석이 빠진 우리들만, 겨울의 깊은 날에 그 녀석의 자취방에 와 있었다.  


 이 고장의 터미널에서 마지막으로 하차하여 택시를 불러 돈을 두 배로 기사에게 지불하고 이 자취방까지 왔지만 결국 돈을 들여 고생을 하러 온 꼴이 되었다. 택시기사의 말로는 밤 열 시가 넘으면 택시비를 더블로 줘도 이곳에는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흥, 웃기시는군. 하고 생각했지만 막상 와보니 택시기사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택시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짙은 어둠을 제대로 뚫지 못했고 몇 번이나 택시의 천장에 우리의 머리가 쿵 하고 닿았다. 멀미까지 날 지경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는 그대로 가버렸고, 아무것도 없는 동네의 밤은 어둠이 너무 농익어서 설명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뼈가 녹을 만큼 추웠다. 세상에나, 얼어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는 둘째치고 따뜻한 아랫목이 있는 방을 생각하며 들어왔다가 우리는 현재 굉장한 낭패를 맞이했다. 평소 녀석이 집에 와서 같이 어울려 술을 마실 때 우리가 자취생활에 대해서 물으면 아주 따뜻한 자취방의 정취에 젖어 있다는 말에 속고 말았다. 우리는 늘 녀석에게 잘도 속아왔다.  


 이대로 밤을 지새워야 내일 첫 차라도 탈 수 있는 것이다. 방 안에 다행이라고 불러야 할지, 작은 가스레인지가 있었다. 우리는 그 녀석과 함께 자취방에서 김밥을 만들어서 밤새도록 소주를 마실 계획이었다. 소주는 혹시 몰라서 각자 한 병씩 들고 왔고 모자라면 근처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사 먹을 요량이었지만 불가능했다.


 우리 모두는 김밥을 악착같이 좋아했다. 분식집에서 파는 김밥은 너무 맛이 나서 별로였다. 무엇보다 비쌌다. 어쩌다가 김밥을 사 먹는 사람들은 뭐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정말 악착같이 김밥을 매일이다시피 먹었기에 돈을 주고 사 먹는 것은 비싸게 느껴졌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먹는 김밥이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는 무슨 종교의식처럼 돌아가면서 집에 모여 김밥을 말아먹었다. 그러다 보니 각각의 김밥 스타일이 생겨났고 시식을 하고 평가를 해주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김밥에 얽힌 자그마한 사연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국민학교 소풍에서 김밥에 관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아픈 기억이 작은 돌처럼 마음속에 굳건히 박혀있었다.


 너무, 자주 많이 먹어서 김밥을 싫어할 만도 했지만 시간의 흐름은 방황하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고 마음속의 작은 앙금을 감싸줄 수 있게 해 주었다. 어이없지만 그만큼 우리들은 커버린 것이다. 이만큼 큰 우리들도 그 녀석의 자취방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방 안에서 봤던 넝마주이 같은 이불이 너무 더러워 덮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방 안의 기온이 상상 이상으로 내려가서 입을 벌리면 갓 끓여낸 라면에서 나는 연기만큼 입김이 나와서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방 한 구석에 시체처럼 깔려 있는 더러운 이불을 전부 꺼내서 방바닥에 깔고 나란히 덮었다. 세 명이 오종종 엎드려 이불을 깔고 덮으니 마음으로나마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딱 마음만 위로가 되었다. 덮어쓴 이불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냄새가 풍겼고 그 냄새는 고스란히 코로 들어와서 우리 모두의 얼굴 표정을 비슷하게 만들었다. 콧속으로 냉기와 지구 상에서 맡을 수 없는 냄새가 한꺼번에 들어오는 기이한 현상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었다.


 그해 겨울, 눈이 내리면 바로 얼어버렸고 그 얼음이 빙판이 되어 몇 날 며칠 계속되던 혹독한 겨울이었다. 나는 그해에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입대를 하기 전 그 녀석과 은숙과 진이와 마지막 밤을 보내려고 그 녀석의 자취방을 찾은 것이다. 아직까지 우리들은 이성관계의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같이 오게 된 것이다.


 그 녀석에게 연락도 없이 온 것이 화근을 불러일으켰다. 놀래 주려고 왔다가 우리는 식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삼일 뒤면 입대를 한다. 솔직하게 입대를 하기 전까지 그 느낌이 어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주위의 소중한 무엇인가를 다 놓고 단체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그 느낌에 대해서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아서 그런지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친구들을 전부 두고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부모님과 오랜 시간 떨어져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술과 기름진 음식과 헤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달콤한 아침의 늦잠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일단 가봐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추위에 떠느라 대화가 점점 줄어들더니 아무런 대화도 하지 못했다. 은숙이 먼저 이빨과 이빨이 부딪혀 달그락 거리는 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녀는 이렇게 추운 날에도 한껏 멋을 내느라 부츠와 스타킹, 짧은 치마와 가죽재킷으로 멋을 부렸다. 은숙의 복장에서는 그나마 가죽재킷 덕분에 겨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김밥 싸 먹자. 우리들 저녁도 아직 먹지 않았잖아. 나는 배가 고파. 너희들은 배가 안 고프다고 해도 나를 위해서라도 김밥을 만들어 먹는 친구들이 되어줘. 그리고 추우니까 소주도 마시자." 라며 은숙은 힘겹게 말을 했다.


 "너무 추워서 엄두가 나지 않아. 소주 마시면 더 추워질지도 몰라." 목소리가 차분한 진이었다. 은숙보다 얼굴이 예쁜 진이라서 우리는 진이에게 연예인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럼 은숙은, 나보다 예뻐서만은 연예인을 할 수 없을 걸 흥. 하며 우리를 웃겨 주었다.


 진이는 은숙처럼 외모를 꾸미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진이는 피츠제럴드나 카프카, 모파상 같은 고전 작가들의 글을 좋아했고 늘 책을 읽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씩 쓰고 있는 소설을 언젠가는 문예지에 출품할 꿈을 지니고 있었고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진이를 늘 응원했다. 진이는 대학 진학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설계사무소의 경리로 취직을 해서 퇴근을 하면 서점에 들러 서점이 마칠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런 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여러 번 읽은 나와 이야기가 잘 통했지만 어쩐지 예쁜 얼굴 탓에 다른 남자들의 시샘을 받거나 오래 붙어 있으면 사귄다는 놀림을 받아서 많은 시간을 내어서 진이와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만은 없었다.


 진이는 은숙보다 예쁜 것이 아니라 다른 여자들에 비해서, 어린 시절부터 예뻤다. 살도 찌지 않았다.


 은숙은 주섬주섬 김밥의 재료를 들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우리들이 각자 집에서 정성껏(라고 해봤자 우리들의 어머니가 챙겨준) 준비해 온 김밥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방에 이물질처럼 널브러져 있던 미니가스레인지를 우리 앞으로 끌어당겼다. 방바닥을 타고 끌려오는 가스레인지는 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자취방에는 라디오도 티브이도 없었다. 그야말로 방! 이 덩그렇게 존재해 있을 뿐이었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를 제외하고 음악이라든가 노랫소리가 나올만한 메커니즘이 단 하나도 없었다. 부엌에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었지만 그 안에는 빨래가 잔뜩 들어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녀석.     


 은숙은 부엌에서 프라이팬을 들고 왔는데 정확하게 프라이팬이라고 부를 수 있는 냄비가 아니었다. 은숙은 휴지로 프라이팬 바닥을 빡빡 문질렀다. 휴지 한 통을 전부 써버릴 기세였다. 진이와 내가 은숙을 말리니 은숙은 씩씩거리며 전투적으로 닦던 행동을 멈추었다. 닦은 휴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고 휴지를 버렸다.


 진이와 나는 은숙의 그 모습을 천천히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저 보고만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냥 이불속에 있지, 움직여서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잖아,라고 자꾸 되뇌고 있었다. 아마 진이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하고 고개를 돌려 진이의 옆모습을 보았다.


 항상 그렇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진이는 언제나 골똘히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입으로 연기가 조금씩 나오는 모습이 눈에 띌 뿐이었다. 은숙은 몇 번 가스레인지를 탁탁하더니 불을 켰다. 고요하고 차갑게 얼어버린 방안에 가스레인지의 불을 보니 우리들의 눈은 반짝거렸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은숙은 가스레인지의 불을 점화하는 데 성공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진이와 나는 불 앞으로 가려고 이불에서 몸을 뺐다. 부탄가스의 그 알싸한 냄새와 불의 열기가 손바닥과 얼굴에 전해졌다.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작은 불꽃이 피어오를 뿐인데 그렇게 느꼈다. 인간은 참 미미한 존재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진이와 내가 가스레인지 불에 손바닥을 갖다 댄 지 몇 분 후에 은숙은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각각의 가방에서 꺼낸 계란지단과 소시지와 게맛살을 데우기 시작했다. 곰팡이 냄새만 나던 방안에 음식 냄새가 영역을 넓혀갔다. 부탄가스의 열기와 김밥 재료의 냄새가 올라왔다.


 좋은 냄새였다. 몸을 안정시키고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게 만드는 종교적인 냄새였다. 각자 소주 한 병씩 들고 왔기 때문에 모두 꺼내서 나란히 세워 놓았다. 마치 살아있는 미니 이스터 석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판 위에 프라이팬이 올라가는 순간 세계를 따뜻하게 달궈주던 찬란한 온기가 사라졌다. 은숙은 프라이팬 위에 김밥 재료를 너무 많이 올렸다. 역시 아직은 우리 중에서는 서툰 초보의 손놀림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진이가 물었다.


 "한꺼번에 왜 그렇게 많이 올려?"라고 물었고 은숙은 대답 대신 젓가락으로 방문 옆 구석을 가리켰다. 구석에는 부탄가스의 시체가 열 개가량 뒹굴고 있었다. 진이와 나는 서로 맑은 눈을 한 채 쳐다만 보았다. 은숙이가 그것을 왜 가리켰는지 미적분만큼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저렇게 부탄가스의 빈 통이 뒹굴고 있다는 건 말이야 지금 가스레인지 안에 있는 이 부탄가스도 수명이 다 됐다는 거야." 은숙이가 차분하게 말했다.


 "어째서?"라고 진이가 말하는 순간 가스레인지의 불꽃이 미약한 스파크를 만들어 내더니 소멸했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 마냥 부탄가스는 생명을 다했다. 부탄가스의 미미하던 불꽃이 그렇게 우리에게 큰 의미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꽃이 소멸되면서 가스레인지 주위의 온기마저 방안의 냉기가 바로 흡수해 버렸다.


 거짓말처럼 방안이 차가워졌다. 추위는 부탄가스의 불 따위로 자신의 영역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우리를 혹독한 냉기로 고통스럽게 했다. 어마어마한 추위가 우리의 등을 덮쳐왔고 우리는 다시 냄새나는 이불속으로 숙명처럼 들어갔다.  


 진이가 이불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녀석의 더러운 이불에서 나는 콤콤한 냄새와 진이의 머릿결에서 나는 샴푸 향이 섞여 묘한 흥분을 일으켰다.     


 냄새가 가져다주는 묘한 흥분.     


 인간의 몸에서 딸려 나오는 냄새나, 인간 자체의 냄새는 분명히 좋지 않다. 우리들은 그 냄새를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진화해 가고 있는 중이다. 프랑스가 향수의 본고장이니 그들의 조상에 대해서 조금은 알만했다.


 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는 건 무엇인가가 생각이 날 듯 말 듯할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런 모습은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눈에는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것과 흡사했다. 고개를 숙인 진이의 목이 보였다. 가늘고 부드러운 목이었다.


 비키니를 입은 모습처럼 평소에 잘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나는 진이의 은밀한 부분을 본 것처럼 부드러운 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진이의 목에는 보이지 않는 확고한 존재감이 있는 것 같았다. '설마'나 '혹시'는 그 속에 없었다. 나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진이의 목은 그런 존재감이 서려있었다. 나도 모르게 진이의 목을 만질 뻔했다.


 진이는 어떠한 생각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진이의 그런 버릇을. 은숙과 나는 그런 진이를 잘 알기에 생각의 끝에 도달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전에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진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추위가 방안을 매몰차게 돌아다닌 지 수 분이 지났을 때 진이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서 진이의 아름다운 목의 세계도 동시에 끝나버렸다. 고개를 드는 순간 방안의 차가운 공기가 이불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어떤 예고도 없이 고개를 들었기에 나는 진이의 목을 보며 들어버린 내 생각이 들킬까 봐 이불을 확 잡아당겼다.     


 끔찍한 냄새의 습격.     


 진이는 내가 이불을 내리면서 머리 모양이 흐트러졌음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진이가 이불 밖으로 나갔다. 집 밖의 온도와 방 안의 온도와 이불 안의 온도의 편차가 거의 나지 않았다.     


 맙소사.     


 오늘 밤에 잠들기는 무리였고 어떻게든 추위를 견뎌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진이는 방안에 버려진 부탄가스의 시체더미에서 다 쓰고 속 빈 부탄가스를 양손에 두 개씩 들고 가스레인지 앞으로 왔다. 이번에는 은숙과 내가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진이의 예측할 수 없는 활약이 끝나면 이번에는 내가 나설 차례인데, 하고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진이는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진이는 방구석에서 부탄가스를 몇 번씩 흔들어보고 엄선해서 네 개를 들고 가스레인지 앞으로 왔다. 진이가 움직일 때마다 냉기가 진이를 따라서 휭휭 움직였다. 대단했다.


 나에게는 부탄가스 두 개를 건네주었고 진이와 은숙은 각각 하나씩 손에 들었다. 건네받은 부탄가스는 얼음 통만큼이나 차가워서 손바닥이 얼얼했다. 진이는 부탄가스를 양손으로 잡은 다음 칵테일을 만들 듯 아래위로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진이의 모습을 보고 있던 은숙도 따라 했다. 그리고 나도.   


 도미노 현상.     


 누구 하나 말 한마디 하지 않았음에도 은숙과 진이는 양손으로 부탄가스 하나를 쥔 채 흔들었고 나는 양 손에 하나씩 쥐고 부탄가스를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부탄가스 안에는 통 밑에 깔려 미미하게 존재하는 가스가 흔들 때마다 아래위로 쉭쉭 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진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지 몰랐지만 순간적으로 동적인 움직임에 열량이 소비되면서 추위이라는 것이 우리 몸에서 조금은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렇다고 체력을 다 소모해가면서 밤새도록 흔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흔들기가 멈추고 나면 이내 흔들기 전의 추위보다 더 폭력적인 추위에 떨어야 한다.


 진이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한 심사숙고의 결과가 이거라니. 나는 울상이 되었다. 가장 세게 흔들어버린 내 왼손(난 왼손잡이다)에 들린 부탄가스를 진이가 낚아채더니 가스레인지에서 수명이 다 된 부탄가스를 빼내고 낚아챈 부탄가스를 가스레인지에 넣고 불을 켰다.


 탁탁, 하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불이 붙었다. 야호라고 외치려는 순간, 불꽃은 미미해서 곧 꺼질 것만 같았다. 진이는 그 꺼질 것 같은 불꽃, 그 위에 우리가 흔들던 부탄가스를 세로로 세우는 것이었다.


 은숙과 내 눈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부탄가스가 터지기라도 하면 모두 죽음이다.라는 생각이 은숙과 나의 머리에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요함을 유지했다. 입이 말랐고 침이 자꾸 목 너머로 넘어갔다. 불꽃 위에 부탄가스를 올리다니, 자살행위가 아닌가. 놀라서 정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러다가 터지기라도 하면 그 후의 우리의 모습과 자취방의 모습이 머릿속을 전부 헤집어 놓아서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만약 부탄가스가 터져 우리가 전부 죽는다면 나는 입대도 못하고, 총도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죽고, 그녀들은 남자 친구 한 번 사귀어보지 못하고 20대를 막 시작하는 시점에서 인생의 끝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딱한 것들.


 가족을 제외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서 장례식 장은 썰렁할 것이다. 우리의 죽음은 지역의 소규모 신문에서 광고 밑에 한 줄로 기사화되어서 한 번 나올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어쩐지 서글펐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부탄가스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옥에서 악마가 올라오는 소리 같았다. 그때 가스레인지 불꽃이 꺼졌다.     


 휴우.     


 다행이었다. 진이가 불을 끈 것이다. 찰나에 불을 껐다. 진이는 가스 레인 지위에서 달군 부탄가스를 다시 갈아 넣어서 불을 켰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새 것의 부탄가스를 넣은 것처럼 불꽃은 힘이 있었고 살아있었다. 화끈했고 강하게 달아올랐다. 덩달아 우리의 얼굴도 달아올랐다.     


 "우리 오빠가 예전에 하는 걸 봤어. 대부분 가스레인지에 들어가는 부탄가스를 완전히 다 쓰고 버리지 않는다고 오빠가 말했거든. 엄마, 아빠가 없을 때 이렇게 하는 걸 오래전에 한 번 봤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어. 자, 은숙아 어서 해." 라며 프라이팬 위의 김밥 재료를 다시 데우게 해 주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방구석의 부탄가스와 부엌에 뒹굴고 있는 부탄가스를 죄다 들고 왔다. 자취방에 있는 다 쓴 부탄가스를 전부 끌어 모으니 20개 가까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스레인지에 부탄가스를 돌려가며 김밥 재료를 데워서 조금은 따듯한 김밥을 먹을 수 있었다.


 가스레인지의 불꽃은 부탄가스를 흔들어서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부탄가스가 될 때까지 계속 되풀이되었다.


 김밥을 말긴 말았지만 자를 수 없어서 각각 김밥의 원형을 들고 그대로 이불속에서 베어 먹었다. 소주잔을 찾으러 부엌에 가봤지만 형용할 수 없는 벌레의 시체가 눌어붙어 있었고 물 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 병 채 들고 소주를 마셨다. 소주가 목을 타고 체내에 들어가니 속이 뜨끈해졌다. 김밥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들도 소주를 한 모금씩 마시고 김밥을 한입씩 베어 물었다. 단무지가 씹히는 소리가 단호하게 차가운 방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지금 먹는 김밥이 지구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먹었던 김밥 중에 가장 맛있는 김밥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김밥을 한 입 먹고 소주를 한 모금.


 몸이 녹아내리며 김밥 속의 재료들이 서로 앙상블을 만들었다. 시금치는 없었다. 우엉이 씹혔고, 계란 지단의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분홍색의 소시지 맛이 뒤에 났다.  


 공교롭게도 나, 진이, 은숙 이런 순으로 이불 안에 엎드려 있었다. 한 명이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다 같이 일어나 앉아서 이불을 등에 덮고 가스레인지에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소주가 몸에 들어가서 그런지 이제 이불에서 냄새가 나는지도 잘 몰랐다. 엎드려서 진이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머리가 내 얼굴을 간질였다.      


 은은한 샴푸 향.     


 나는 그 향에 순간 발기해버려 엎드려 있기 난처했다. 하지만 거짓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하기 싫어서 그대로 참고 엎드려 있었다. 발기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을 여자들도 알까. 만약 지금 발기해 있다는 것을 알면 진이는 몹시 실망하겠지. 발기는 날씨와 같았다. 의지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 에스키모 인들을 봐봐. 인간은 경험으로 하나씩 배워나가는 동물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생각하느라 발기했던 그것이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서서히 뭔가 되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 안의 공기는 냉기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차갑고 서늘했다. 은숙이 만든 김밥의 개수는 총 17개였다. 많은 양이었다. 우리는 김밥을 먹기 위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김밥은 만들어지면서 식어가기 시작하여 다 말고 나면 차갑게 변해버렸다. 우리는 그 차가워진 김밥을 하나씩 들고 베어 물었다. 그리고 소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김밥은 견고한 피라미드처럼 굳건히 쌓여있어서 좀처럼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추위만 아니었다면 그녀들은 꽤 재미있는 추억거리인걸, 하는 눈치였다.     


 버스는 이미 오래전에 끊겼고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타고 사십 분가량 언덕길을 지나 몇 번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거쳐 어딘가를 에둘러서 도착한 곳이 이 동네였다. 택시에서 내려 걸어오면서 동네의 하나뿐인 슈퍼는 고집 있는 노인의 다문 입처럼 이미 불이 꺼져있었다.


 동네는 마치 마계촌 같은 느낌이라 주말에는 갑옷의 기사는 나 몰라라 하며 속속 마계촌을 빠져나가버리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주말에는 일찍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꼭꼭 틀어박혀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것일까. 아직도 이런 곳이 존재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겨울의 냉기는 어둠이 깊어질수록 비례했다. 시간이 새벽을 향해 갈수록 방안의 대기는 얼음을 부어버린 듯 추위가 엄습했고 우리들은 몸을 서로에게 더욱 붙일 수밖에 없었다.


 열약한 환경과 최악의 상황에서 은숙이 만든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식다 못해 차갑게 되었는데도 맛있었다. 차가운 맛있는 김밥을 손에 쥐고 먹다 보니 도파민이 나름대로 생성되는 것 같았다. 아세틸콜린도 분출되는 것 같았고 말이다. 인간의 몸 안에는 너무 많은 장기가 있다. 그리고 분비해내는 호르몬도 너무 많다.


 그중에 남성의 발기를 관장하는 호르몬은 무엇일까. 진이가 옆에 있으니 진이의 향 때문에 욕망 없이 나는 자꾸 발기를 했고, 이런 생각들을 하며 나는 추위를 견디려고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조심스레 부탄가스를 데우고, 다시 깔아 끼우고 손을 녹이고 김밥을 먹고 소주를 마셨다. 우리들 중 누구도 졸음이 오지 않았다.   


 "저기 말이야, 어쩐지 너 자꾸 옆으로 밀려 나가는 것 같아. 추우니까 내 쪽으로 바짝 붙어줘." 라며 얼음인간이 되어 버린 듯 덜덜 떨며 진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진이와 몸이 붙는 게 어색해서 옆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들이 더욱 추워했다. 나는 진이 쪽으로 몸을 바짝 당겨 붙었다.


 샴푸 향.


 어째서 여자들에게는 이렇게 좋은 향이 날까. 진이의 좋은 향은 발기된 그것을 더욱 확고한 자세로 만들었다. 나는 이불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이었다. 남성의 발기 호르몬을 생성시키는 외적 요인으로 여성의 좋은 향이 있었구나. 이것이 페로몬인가.     


 진이, 은숙, 그 녀석 이렇게 우리는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엄마들이 같이 놀게 했다. 엄마들도 전부 친하여 여름이면 마당에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강된장에 애호박으로 저녁을 먹기도 했다.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면 우리는 마당을 뛰어다니다 엄마들에게 붙들려 밥을 먹었다.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팬티만 입고 같이 목욕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어느 날 보니 그녀들은 숙녀가 되어있었고 그 녀석과 나는 수염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생리대를 감쪽같이 사용하는 시기를 이미 지났고 그 녀석과 난 휴지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영원히 멈춰 있을 것만 같은 시간의 하얀빛은 머리 위에서 이리저리 맴돌다 어느 순간 보면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영영 간극이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각각의 집에서 구워대던 삼겹살 냄새를 바람은 실어 날랐고, 삼겹살 냄새는 배분하듯 사람들에게 퍼져갔다.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를 확실하게 우리에게 인식시켰지만 우리는 바람의 존재를 가끔 잊을 만큼 훌쩍 커버렸다.      


 은숙은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마셔간다. 김밥도 벌써 7개째다. 이제 몸매는 포기해버린 듯 초연하게 고대 문형의 벽지의 벽을 보고 김밥을 맛있게도 씹어 먹었다. 추워서 그런지 끊임없이 김밥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렸다.


 김밥을 먹는다는 표현보다 유물론적 김밥을 그녀의 몸 안에 옮겨 놓는 행동 같아 보였다. 그동안 김밥을 그렇게 먹었어도 김밥을 직접 말게 되면 꽤 맛있는 음식인 모양이었다.  


 "있지 말이야?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세 명 이서 같이 모여 있는 거 오래전에도 한 번 있었지?"라고 은숙이 말했다. 은숙은 계속 김밥이 입에 들어가는데도 그런 말을 잘도 했다.


 "글쎄,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같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이전에 같이 있었던 적이 있었나? 그것도 밤새도록 말이야?" 진이는 소주가 쓴 듯 코에 주름을 만들어 말을 했다.


 나는 은숙의 말에, 언제였나 하며 기억의 줄을 잡고 계속 잡아당겨 보았다. 동네 빈 공터도 줄에 딸려 나왔고, 배드민턴도 나왔고, 고무줄놀이도 나왔고 동네 강아지 멍돌이도 나왔다. 구슬치기와 공기놀이도 나왔고, 도너츠도 나왔다. 도너츠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요즘처럼 전문점에서 보는 도넛이 아니었다. 호호 할머니와 상반된 얼굴의 할머니가 커다란 철제 대야를 들고 다니며 꺼져가는 동네를 찾아와서 일요일마다 도너츠을 팔았다. 그저 도너츠였다. 중간이 뻥 뚫린. 도너츠는 밀가루 반죽의 빵에 설탕이 입혀진 아주 단순한 도넛이었다. 하지만 마을의 아이들이 서로 먹으려고 몰려들었다.  


 기억이라는 것이 이렇게 추운 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릴없이 앉아 있으면 계속 나오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기억의 끈은 더 이상 당겨지지 않았다. 우리들이 함께 밤새도록 추운 날 같이 있었던 적은 내 기억으로는 없었다. 추운 날이 아니더라도 밤새 같이 있지 않았었다. 내 기억의 끈은 그렇게 말을 해주고 있었다.      


 "밤새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왜 있잖아, 그때도 겨울이었는데 그 녀석이랑 너와 진이랑 뒷산으로 올라갔던 적이 있었어. 우리 모두가 말이야. 우리가 살던 작은 달동네 위에 방송국이 하나 들어서기 전에 말이야. 그때 그 산에 종종 올라갔잖아. 너 소나무에도 곧잘 올라가고 말이야." 은숙은 김밥을 몇 번 씹지도 않고 위장 안으로 꿀꺽 넘겼다.  


 "어 맞아, 우리들 너무 작았지만 어울려 다녔었지. 봄여름 할 거 없이 뒷산으로 올라가고 말이야. 너 소나무 위에서 바지가 나뭇가지에 걸려서 엉덩이가 보이기도 했고……." 라며 진이가 웃었고 은숙도 맞장구도 쳤다.


 그랬었나.


 "그때 말이야, 산의 뒤편에 활궁장이 있었고 우리는 활궁장 뒤편에 혹시 떨어져 있는 화살을 주우러 많이 다녔잖아. 분명 그랬어. 그 화살을 주워서 딱히 무엇을 하겠다는 건 아닌데 우리는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풀숲을 헤치며 다녔어. 그때 좀 위험했던 적도 있었어. 활궁 장에서 활을 쏘는 시간이 다가오면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이 과녁의 뒤편으로 가서 사람들이 있나, 혹시 근처에 위험한 요소가 있는지 확인하는데 그 근처엔 사람들이 없으니까 일하는 사람이 신중을 가해서 일 할 필요가 없었던 거야. 게다가 겨울이었어. 추우니까 대충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은숙의 입으로 김밥의 향이 새어 나왔고 그 사이에 소주의 향도 끝에 남았다.


 진이는 은숙의 말이 처음 듣는 새로운 이야기인양 열중하고 듣느라 김밥을 베어 물었을 때 입으로 단무지가 잘리지 않고 그대로 빠져나왔다. 진이는 단무지를 앞니로 똑 끊어서 오물거리며 야무지게 씹어 먹으며 은숙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우리들은 그 큰 과녁 뒤편에서 혹시 흩어져있는 화살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지. 지금처럼 우리 세 명은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고 허리를 구부리고 화살을 찾고 있었어. 그 녀석은 지금처럼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슝 하면서 아주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턱! 하는 둔탁한 소리가 퍼지는 거야. 그때, 그 소리를 제일 먼저 들었던 게 바로 너야”라며 은숙은 김밥을 나를 가리켰다.


 김밥은 무게 때문에 밑으로 휘어졌다. 마치 무엇과 닮았다. 은숙이가 들고 있는 김밥에도 단무지가 그대로 빠져나간 공백이 보였다. 정확하고도 아주 또렷하게 그 공백이 눈에 들어왔다.


 은숙의 손에 들려있는 김밥은 생기를 잃어버리고 축 늘어진 남자의 그것과 참 닮았다. 발기하지 못하는, 영영 구제불능이라 잠자리에서 여자에게 구박을 받는 그것과 말이다.


 수그러들어버린 나의 그것과는 닮지 않았다. 좀 창피하지만 나의 그것은 저 힘없는 김밥보다는 훨씬 작았다. 그렇지만 구제불능의 느낌이 나는 김밥의 메타포와는 달랐다. 그러니까 나의 그것은 구제불능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째서 김밥 따위는 페니스로 둔갑을 하는 것일까.     


 "넌 고개를 먼저 들고 이건 말이야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소리야!라고 크게 말했어. 그리고 양 팔로 우리는 감싸고, 양 어깨 밑에 우리를 넣어서 과녁 바로 뒤로 데리고 갔어. 과녁은 총 네 개였어. 아마도 그날은 과녁을 다 사용하는 모양이었을 거야. 슈욱 턱! 하는 굉장한 소리가 들리고 몇 초 만에 다시, 슈욱 턱! 하는 소리가 네 개의 과녁에서 모두 들리는 거야. 나 사실 그때 굉장히 두렵고 무서웠어. 우리가 쪼그리고 앉아있는 과녁을 화살이 뚫고 나와서 머리에 꽂히는 상상을 했었거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장소에 앉아 있다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몸을 사시 떨듯 떨었어. 나는 어쩌면 그 이후에 그때만큼 무서웠던 적이 없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아직도 생생하게 그때를 기억하고 있어." 여기까지 말을 하고 은숙은 다시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추워서 떠는 것인지, 아니면 화살의 기억이 떨게 했는지 모른다. 설명할 수 없는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이불을 통해서 은숙의 떨림이 전해졌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추억 한 가지씩은 가져다주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이 추운 곳에서 떨면서 지새운 밤도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다.      


 "그때 과녁 밑에서 떨고 있던 진이와 나를 계속 감싸 안아준 게 너였거든.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주었어. 나는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없었던 거야. 하나의 과녁에서 턱! 하며 화살이 꽂히면 또 다른 과녁으로 화살이 날아들었어. 그 소리는 아주 딱딱하고 둔탁한 소리 같았어. 소리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을 아프고 고통스럽게 한다는 게 너무 놀라고 무서웠던 거야. 과녁으로 날아와서 제대로 꽂힌 화살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활을 잘 못 쏘는 사람이 쏘아댄 화살은 과녁 사이로, 그대로 날아와서 소나무나 뒤편의 어느 지점에 있는 나무에 꽂히는 거야. 그 소리는 쉐엥하며 공기를 갈라버리는 소리였어. 물이나 공기를 반으로 가를 수는 없잖아? 하지만 그 화살은 날아가면서 공기를 반으로 갈랐던 거야. 갈라진 공기에는 죽어있는 또 다른 공기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 벌어진 틈으로 나를 마치 끌고 가버리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어. 벌어진 공기의 틈 속에서 나는 눈빛을 봤어. 그 눈빛, 아파하는 앙칼지고 모진 몸부림을 나는 봐 버렸던 거야. 난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아주 격하게 뛰었던 거야. 중세시대의 드라큘라에 발각된 인간처럼 심장이 터져 드라큘라에게 피를 빨리기 전에 죽어버리는 사람처럼 심장이 세게 뛰었어. 그때 네가 나에게 그랬어. 어디 아프냐고 말이야.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야. 괜찮다고 말이야." 은숙은 술기운인지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나는 왜 은숙의 이야기에 전혀 닿을 수 없는 것일까. 기억을 계속 잡아당겨 보았지만 팽팽하기만 할 뿐이었다. 당겨지지 않았다.


 "도대체 그때가 언제야?"라고 나 역시 소주를 한 모금 마시고 은숙에게 물었다.


 "우리가 10살인가 9살 때쯤이었을 거야." 진이가 대답을 했다. 진이도 기억을 해 낸 것이다. 그때쯤의 일이면 나 역시 기억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은숙의 소주병은 밑바닥을 보였고 진홍색의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을 뻗어 진이의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앉아서 우리는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활을 쏘는 소리를 들으며 떨어야 했어. 탁! 탁! 하는 소리가 나면 나와 진이는 양손으로 귀를 막았지. 아마 너도 무서웠을 거야. 그런데도 쪼그리고 앉은 채로 우리의 양어깨를 꼭 감싸주었어. 조금은 든든했어. 아니 아주 든든했었어. 아마 그런 너의 팔의 느낌이 어깨를 통해 전해지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을지도 몰라. 그렇게 한참이 지나니 활을 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꽤 오래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듯 해. 넌 이제 완연히 끝났다고 느꼈는지 과녁 옆으로 고개를 내밀려고 했어. 헌데 나는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어. 꼭 마지막의 누군가가 활을 늦게 쏠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 거야. 나는 너의 팔을 꼭 잡았어. 힘을 얼마나 줬는지 넌 아프다고 했거든. 마냥 여기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수 없다며 넌 우리를 안심시키고 고개를 내밀었어. 내 심장은 정말 터질지도 모를 정도로 뛰었어. 다행인지 넌 이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며 나와 진이를 데리고 과녁을 등지고 허리를 구부린 채로 계속 걸어갔어. 그냥 바로 일어나서 걸어도 될 것을 우리는 허리를 구부리고 어정쩡하게 걸었는지 몰라. 아마도 아이들의 습성이었거나, 우리는 너무 무서워서 그랬는지 몰라”라며 은숙은 웃었다. 얼굴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방 안의 기온은 차가웠다. 가스레인지는 불꽃을 뿜어냈지만 가스레인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 쇠붙이는 아주 차가웠다. 뜨거운 불꽃을 뿜어내면서도 차가운 가스레인지는 뭔가 은숙이 말했던, 반으로 갈라진 공기의 틈 같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새벽으로 갈수록 부탄가스는 완전히 못쓰게 되어 쌓이는 수가 점점 늘어났다. 아직 아침이 오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우리들 중에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우리가 어디까지 걸어갔는지 모를 거야. 정말 멀리까지 걸어갔어. 구부정한 자세로 말이야. 다음 산 중턱까지 그렇게 걸어갔으니. 겨울의 메마른 풀숲을 헤치며 말이지. 그 날 너도 무서웠을 거야. 아마 마음속에, 어렸지만 우리를 끝까지 지켜줘야 한다는 마음이 깊게 있지 않았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여기가 따뜻해져." 은숙은 진이를 보며 김밥을 자신의 가슴 쪽에 대었다.     


 은숙은 그날 이후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나는 너무나 완벽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이도 웃으며 은숙의 말에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둘은 그때의 꼬꼬마였던 나를 기억해내고 동시에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차가운 방안에 울려 퍼졌다. 나만 이야기에 스며들지도 못했고 웃지도 못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세계에 나는 끼어들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밀어 넣으려고 해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이가 말을 이어받아서 이야기를 했다.


 "이제 내가 얘기 해 줄게."


 이야기가 또 있단 말인가? 어차피 지어낸다 해도 나는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다음 그 녀석을 찾아야 했어. 그 녀석은 우리와 함께 산으로 올라와서는, 우리가 과녁 밑에 쭈그리고 앉아있을 동안 산을 돌아다닌 모양이야. 그 녀석은 너와는 달리 소나무를 타는 것엔 선수였기 때문에 소나무가 많은 곳을 우리는 찾아보았지. 그 녀석을 애타게 불렀어. 산속이라 저녁 5시만 되면 어둑해지니 우리는 그 녀석을 어떻게든 찾아서 데리고 가고 싶었는데 그 녀석은 산속으로 계속 들어간 흔적이 있는 거야. 그런데 타는 냄새가 났어." 진이는 잠시 고개를 번갈아가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 냄새는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가차 없이 태우는 냄새였어. 어디선가 그 녀석이 후다닥 달려오더니 우리들이 입고 있는 점퍼를 벗어달라는 거였어. 그리고 그 녀석은 너의 점퍼를 벗겨서 어디론가 달려갔어. 우리는 달리기를 잘하는 그 녀석을 필사적으로 따라갔지. 산속에는 군데군데 참호가 있었는데 어렸던 우리들은 그 참호가 무엇을 하는 용도인지 몰랐어. 그 녀석은 따라오는 우리를 보더니 왜 따라오냐며 화를 내는 거야. 그러더니 우리들에게는 그 참호 속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어. 그 녀석의 건너편으로 자욱한 연기가 나는데 그 속에서 불줄기가 보이는 거야. 불줄기는 너무도 거대하고 꼬챙이처럼 곧아서 부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어. 바람이 한 번 불면 그 불줄기는 어느새 저쪽에서 이쪽으로 날아와서 소나무를 태우고 있는 거야. 대단했지. 그렇게 타오르는 불줄기를 보는 게 처음이었거든. 그때도 너는 우리의 어깨를 감싸 안은 다음 그 불줄기를 놀란 눈으로 보며 있었어." 진이의 말에 은숙은 옆에서 맞아 맞아하며 그때를 자세하게 회상하는 듯했다. 더불어 새 김밥이 은숙의 손에 쥐어졌다. 차가운 김밥은 오늘 밤이 지나면 은숙이 덕분에 다 없어질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불줄기가 이곳저곳에서 쉭쉭 거리며 연기와 함께 새롭게 잉태하는 가운데 그 녀석은 너의 점퍼와 그 녀석의 점퍼를 펄럭이며 불을 끄고 있는 거야. 고작 10살짜리가 말이야. 당시에 그 녀석은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덩치도 커서 마치 거인 같은 모습이었지만 10살이었다고 10살. 그런 작은 움직임으로 불을 끌 수는 없었어. 매서운 바람이 한 번 불면 그 바람에 몸이 실려 가듯 불기둥은 순식간에 이곳으로 불줄기의 가지를 뻗는 거야. 마른 나뭇가지는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살아있는 나무들을 태우는 냄새를 풍기며 우리가 있는 참호 쪽으로 아가리를 벌리고 다가오는 거야. 숙이처럼 나도 너무 무서웠어. 쉭쉭 하며 불기둥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너무나 무서워서 울음도 나오지 않았어. 그때 그 녀석이 달려와서 어서 나와, 하며 빨리 동네로 달려! 하면서 달려가기 시작하는 거야. 생각해보면 그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골치 아픈 녀석이야, 그치?" 진이가 이번에는 나를 보며 말했다.


 고개를 돌리는데 샴푸 향이 또다시 번졌다. 샴푸 향과 불기둥의 냄새가 동시대에 존재했다.


 살아있는 소나무를 태우고 산을 태우며 달려드는 불기둥의 냄새는 거대하고도 세찼을 것이다. 지금 이 방을 뒤덮고 있는 살을 파고드는 냉기와 흡사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어렸으니까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잘못하면 불에 홀라당 타서 죽거나 화상을 심하게 입었을지도 몰랐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면, 불기둥이 드세게 달려드는 것에 비한다면 차가운 냉기는 천천히 모르는 새 조여 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달렸어. 불기둥이 우리 뒤를 따라왔거든.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녀석이 추워서 우리가 있던 참호에서 조금 떨어진 참호 속에서 불을 피우다 바람에 떠오른 불씨가 마른풀에 옮겨 붙으면서 그렇게 됐나 봐. 우린 그런 전후의 사정을 모르고 달리기 시작했어. 그때 그 녀석은 우리를 놔두고 다른 길로 가버렸어. 그 길은 우리 여자아이들은 갈 수 없는, 그러니까 좀 험난하다고 해야 할까. 산의 깎아지른 절벽 같은 곳이었어. 절벽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우리는 너무 미약하고 어렸고 깎아지른 것만큼은 확실하니 말이야. 너도 그 녀석을 따라갈 수 있었지만 넌 우리의 손을 꼭 쥔 채 달렸던 거야." 진이도 추위를 이겨가며 야무지게 말했다.


 "하긴 그 녀석의 마음도 이해가 가. 그 녀석, 산에 불을 내고 얼마나 놀랐겠어. 지금도 표정이 생각나. 그 녀석 놀라면 눈이 꽤 커지잖아. 특히 성적표 받을 때 말이야." 진이의 말에 맞아하며 은숙이 웃었다. 그 녀석은 놀라면 얼굴 표정이 달라진다. 나도 그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째서 일까.


 그 정도의 일이라면 난 분명히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기억이 몽땅 깡그리 사라져 버린 걸까. 내가 애써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을까. 어째서 그녀들이 하는 말이 낯설기만 한 것일까. 은숙과 진이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나는 어째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그날 우리는 온몸이 먼지와 흙을 잔뜩 끼얹고 산을 내려온 거야. 그리고 우리는 겁이 났던 거지. 학교에서 산불예방과 산불을 내고 나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겨울로 접어들어 매일매일 학교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말했으니까. 지겹도록 말이야. 사실 산불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날 리도 없는데 그 녀석은 참 이상해. 산에 불을 내다니 말이야." 진이의 말에 나는 그 녀석의 표정을 떠올렸다.  


 "우리는 전부 약속이나 한 듯이 동네로 뛰어와서 우리 집의 다락방으로 올라갔어. 생각나? 우리 집 다락방 말이야." 진이는 팔꿈치로 나를 툭툭 쳤다. 나는 다락방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늑했잖아. 그 좁고 작은 다락방에 우리는 지금처럼 앉아서 이불을 덮고 있었어. 우리 몸에는 아직 타다 남은 재의 냄새가 배어 있었고 고요한 세계에 우리들이 내는 심장소리만 크게 들리는 날이었어. 이제 곧 우리는 부모님에게 혼날 일이 걱정이었어. 그때 너무 무서웠거든. 뭐가 무서웠냐 하면 산에 불을 내면 부모님까지 잡혀간다는 선생님의 터무니없는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던 거야.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저 멀리 사라져 갔어.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불을 좀 더 뒤집어쓰고 떨어야 했어. 넌 내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밑으로 내려가서 물을 가지고 올라왔어. 냉장고 안의 물병을 들고 용케도 부엌에서 컵도 찾아서 들고, 차곡차곡 다락의 계단을 침착하게 올라왔지. 그리고 천천히 물 컵에 물을 따르고 나와 숙이에게 먹였어. 마치 아빠가 아이에게 물을 먹이듯이 말이야. 물을 한잔 마시고 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지. 넌 우리들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다 본 후에 너도 한잔 마셨어. 물을 두 잔이나 마신 걸 보면 너 역시 무척이나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텐데 말이야. 우리는 물을 한 잔씩 마신 마음 그제야 서로를 보았어. 그러니까 그을린 얼굴이라든가 손에 묻은 흙먼지라든가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었어. 그리고 숙이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난 거야. 넌 아무렇지 않게 또 내려가서 우리 집 부엌을 뒤져서 뭘 들고 왔는지 알아?" 진이는 나에게 물었다.


 진이의 입에서도 향긋한 김밥의 냄새가 났다. 진이의 머릿결에서 샴푸의 향이 연주회처럼 흘러나왔다. 이불에서는 여전히 정의할 수 없는 더러운 냄새가 났다.      


 발기의 기운.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진이에게 뭘 들고 다락으로 올라왔는지 모른다고 했다.


 은숙과 진이는 서로 쳐다보더니 "김! 밥!"이라고 동시에 말했다. 김밥은 그때부터 지금껏 줄기차게 우리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 날, 그 어린 나이에 산에 불이 나는 모습을 봤으니 나 역시 무서웠을 것이다. 아마도 오늘처럼 진이와 은숙의 옆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다가 발기를 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렸었고 그렇게 신체가 변화하는 것에 당황스러웠을 수 있다. 아닐지도 모른다. 고작 10살인걸 뭐. 열 살의 발기는 어쩐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방안의 어마어마한 냉기와 꺼져가는 부탄가스의 불꽃이 팽팽하게 대립을 했다. 우리들은 불꽃에 편들어 주기 위해 끊임없이 오래 전의 이야기를 했다.


 분명 오늘도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이 차갑고 냉랭한 공기에서 벗어날 수 도 없다. 그저 날이 밝아올 때까지 견뎌야 한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없다.


 우리는 이불을 좀 더 등으로 끌어올렸고, 김밥을 베어 물었고, 소주를 한 모금씩 마셨다. 진이의 머리에서 샴푸 향이 연하게 변했지만 내 코를 통해 온 몸의 감각을 건드렸다. 점점 나를 끌어당겼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차즘 점처럼 변해갔다.


 나는 그 녀석이 산에 불을 내고 절벽으로 홀로 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분명 우리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요량이었다. 진이와 은숙의 대화가 차츰 향이 되어 갔다.      


 향도 점으로 바뀌어 간다.    


 그녀의 향.      


 어느 순간 점처럼 변한 목소리가 차가운 밤의 공기를 가르고 선으로 바뀌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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