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에세이
하루키의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가 한국에 정식 출판이 되었다. 자기 고백 같은 아주 짧은 수필 형식의 글이 일본의 문예지 문예춘추 6월호에 실려서 한국에는 다른 에세이와 묶음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그대로 문고본의 형태를 띠고 양장본의 하드보드 책 표지를 창작하고 출판이 되었다. 나는 코로나가 도래하기 전에 문예지 문예춘추를 가지고 싶은 마음에 일본으로 붕 가서 서점에서 문예춘추 하나 주시오, 해서 저 책 한 권 달랑 사들고 바로 한국으로 붕 왔다.
이전에도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를 심야 북카페에서 번역해서 낭독한 버전을 그대로 받아 적어서 올린 적이 한 번 있었다. 편견이지만 정식 출판이 된 버전보다 심야 북카페에서 번역한 버전이 더 좋은 것 같다. 첫 시작부터 시나가와 원숭이가 나타나서 무라카미 하루키 너에게 이름과 성, 둘 중에 하나의 선택권을 주겠다. '무라카미'와 '하루키'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넌 무엇을 택하겠나.라고 시작해서 하루키는 아버지의 성을 선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고양이를 버리게 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식 출판된 버전보다 훨씬 초현실 적이고 하루키에게 밀착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https://brunch.co.kr/@drillmasteer/625
하루키의 한국판 에세이 ‘고양이를 버리다'를 보면 어린 하루키가 고양이와 뒹구는 삽화가 있다. 아주 평화롭고 하루키는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고 어린 하루키는 넘치는 사랑을 고양이에게 조금씩 야금야금 나누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삽화들이다. 어린 하루키는 받은 사랑을 무럭무럭 먹으며 자랐고 그것을 빵조각처럼 떼어서 고양이들에게 주었다.
에세이에 삽입된 어린 고양이를 안고 있는 어린 하루키의 그림은 원작의 저 사진에서 비롯되었다. 어린 하루키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사랑을 주고 같이 잠들고 했던 나날들이 삽화로 재탄생되었다. 그 오래전,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추억을 공유했던 그 당시로 되돌려 놓는다. 그곳에는 언제나 고양이가 어린 하루키 옆을 지키고 있었다.
고양이는 어떻든 태어나졌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몹시도 중요하다. 그건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나처럼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에게는.
고양이는 그림자가 햇살을 따라 움직이듯 천천히 생을 보낸다. 마치 느긋한 물수제비 같다. 그런 모습을 보며 고양이보다 오래 살 어린 하루키는 고양이와 같은 마음은 지니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고양이는 기분 나쁘게도 늘 편안하게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다리를 허공에 들면 드러나는 은밀한 부위도 참으로 고양이스럽다. 그들에게 복잡하고 난잡한 인간사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 매일 낮잠을 잘 곳을 물색하고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자리가 고양이에게는 먹고사는 일이다.
집집마다의 비밀을 고양이는 다 알면서도 숨긴 채 볕이 드는 곳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며 소변으로 비밀을 배출한다. 가끔씩 꼬리를 움직이는 것으로 낮잠을 즐긴다는 것을 아는 정도다. 그들은 햇살을 얇은 이불처럼 덮고 잠들다 눈을 뜨면 변색되는 풍경을 천천히 구경한다.
어린 하루키는 누워있는 고양이를 보면 다리와 배 사이, 야들야들한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 슬슬 비비고 싶었다. 졸음에 겨워 눈을 반쯤 뜬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의 세계에 한 발 들여놓은 것 같다. 나에게도 꼬리가 있다면 견고한 인간의 감정을 벗은 채 슬슬 움직여 등까지 올려 누군가를 즐겁게 해 줄 텐데.
그런 어린 고양이가 나무 위에서 그만 죽은 것을 슬프게 생각한 어린 하루키는 그 장면을 가슴에 고양이처럼 품은 채 어른이 되었다.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 승. 해. 간. 다. 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