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4일째 저녁
301.
마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는개가 웃었다.
“와인을 좋아하는 무라카미 류가 이런 글을 썼어요. 자살보다 섹스. 어떻게 생각해요?”
“그건 그저 책 제목일 뿐이잖아. 내용은 국가의 권력구조를 탓하는 내용도 있고……. 위안부의 문제나……. 또…….”
는개가 살짝 웃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배고픔을 잊을 만큼 재미있어 보였다.
배가 고프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야.
는개는 와인을 고르면서 나라별로 나오는 와인의 특색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마동은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와인의 세계는 꽤 복잡하고 난해했다. 인간은 자신이 들으려고 하는 것만 잘 들린다. 인간이란 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듣고 싶은 것만 입력한 정보가 머릿속에 가득해서 그것이 깨지면 쉽게 무너지고 좌절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마동은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 는개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와인을 잘 안 마시니까 당신을 위해서 당도가 좀 있는 모스카토 다스티를 구입해야겠어요. 회에도 아주 잘 어울릴 거예요.”
이 여자는 모르는 게 무엇일까.
“모스카토 다스티도 여러 종류의 맛이 있어요. 마트 와인치곤 조금 비싸기는 해도 시작하는 사람이 마시면 반할 수 있을 거예요. 이태리 산이라 더욱 괜찮을지도 몰라요. 드라이한 칠레산 몬테스는 당신이 마시기엔 조금 그럴 테니까.”
는개가 독백을 하는 건지 대화를 하는 건지 마동은 잘 알 수 없었지만 굳게 입을 다물고 알았다며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는개는 그런 마동의 모습이 재미있는 것 같았다.
“보편적인 맛이 있어요. 꿀에 절인 배 맛이 나는 것도 있어요. 싱그러운 풋사과의 맛이 있을 텐데, 5월의 아카시아라는 이름의 와인도 있고……. 당신에게는 그러니까……. 음 왜 모스카토가 보이지 않지?”
는개는 대화 도중에 혼잣말을 하더니 직원을 찾으러 어딘가로 가버렸다. 5월의 참새처럼 지저귀던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가버리니 마트 안은 순식간에 정적과 공백이 뻥하고 생겨났다. 누군가 옆에 있다가 갑자기 사라진다는 건 공백의 여운이 남는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아무나 될 수 없듯 다른 사람이 옆에 있다가 그 사람이 가버렸다고 해서 공백이 이렇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는개가 옆에 있다가 일순간 직원을 찾으러 가버리고 그 순간 커다란 공백이 쿵하며 떨어졌다. 마동은 그동안 자신의 공백을 잘 메꿔왔다. 연상의 그녀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도,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친구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떠나 버렸을 때도, 군대에서도 그랬다. 마동은 그 모두가 사라지고 난 후의 공백을 잘 메꿨다. 잘해왔다. 그렇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등을 두드려 줄 것 같았다. 공백은 더럽혀져 있었고 지저분함이 껴버린 거대한 기름때 웅덩이 같았지만 마동은 걸레질을 꾸준히 했고 증오가 쌓여서 눌어붙으면 마동은 칼날이나 금속으로 잘 깎아냈다. 그 공백을 채우려 하는 더러운 불순물을 마동은 자신의 관념으로 채워왔다.
지금, 단지, 는개가 옆에 있다가 와인을 구하려고 사라졌을 뿐이지 않은가.
그러했다. 곧 그녀가 옆으로 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마음은 는개의 부재가 남긴 공백이 심연으로 자꾸 들어왔다.
는개가 지금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는 초조함이 불러들인 공백일까.
마동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초조함은 늘 그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는개는 마동에게 여자 친구도 애인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부인할 수 없는 공백의 크기가 마동을 상심으로 빠뜨렸다.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력함에 사로잡히다니. 혼란스러웠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혼란이었다. 거시적으로 공기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눈이 따가웠고 생 아몬드의 냄새가 흘렀다. 마동은 어떤 무엇인가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이곳에서 떠나고 싶었지만 는개가 곧 올 것이다. 마트에 사람들이 없는 것이 이상했다. 는개를 같이 데리고 나가야 한다. 생 아몬드 냄새는 알파 입자 가속기에 의해 청산가리를 만들어낸다. 마동은 상자 속에 갇힌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안절부절 이었다. 마동은 바구니를 떨어뜨리고 머리를 감쌌다. 이 혼란은 미시세계에서 나온 것이다. 는개의 공백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는개의 공백이 이처럼 무거운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힘들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녀가 가버린 잠깐의 공백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날카롭고 일그러진 공백이었다.
청산가리가 가득한 공백.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