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Dec 12. 2020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302

11장 4일째 저녁

302.


 삐거덕거리는 숨소리가 싫어 귀를 막아야 할 지경의 공백이 마동의 옆에서 혀를 내밀며 도사리고 있었다. 공백 속에서 시간은 멎어 있었다. 딱딱한 돌처럼 굳어서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마동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동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렀다.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크게 소리를 질러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다. 철길 위에서 친구들을 부를 때 그때에도 이렇게 크게 고함을 질렀다. 앞으로 이렇게 큰 소리를 지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마동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멎은 시간을 향해서 생 아몬드 냄새를 향해 꺼져버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리가 휘청했고 입에서 타액도 흘러나온 것 같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마동은 제대로 숨을 쉬었고 잠시 서 있다가 외인 코너 옆의 음료자판기와 벤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내 시간은 연속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신나게 달려와서 마동의 정신을 여러 갈래로 끊어 놓고 발로 마구 흩뜨려 놓은 듯했다. 그래서 연속적이지 못한 시간성이 불쑥불쑥 나타나서 마동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봤던 사라 발렌샤 얀시엔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녀는 분명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었다. 그 사실은 매일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확실한 것이었다. 마동은 비로소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 윤곽을 제대로 기억해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얼굴과 는개의 얼굴이 겹쳐졌다.


 맙소사.


 마트 안은 그로서리 쇼핑을 하는 사람도 직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여름밤의 대형마트의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자라는 구석이 많은 풍경이었다. 마동은 자신이 앉아있는 벤치 옆의 음료자판기를 보았다. 종류별로 탄산음료가 가득했다. 마동은 주머니의 동전을 꺼내려고 주머니를 헤집어 보았지만 동전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동은 집에서 나와 카페에서 커피 값을 현금으로 계산하고 건네받은 잔돈 중에서 동전이 있음을 수산시장에 가기 전에 확인했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잔돈으로 동전을 또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는 동전이 들어있어야 정상이지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동전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줬던 것일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마동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기억은 전혀 없었다. 동전을 는개에게 줬을 리가 없다. 미시세계에서 건너온 무서운 공백이 마동에게 자유를 안겨 준 대신 들고 간 것이 동전이었다.


 나는 주머니의 동전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소리도 없고 잔재도 남겨두지 않고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주머니 안의 물품은 전조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주인의 바람과는 무관하다. 반드시 주머니 안의 물품뿐만이 아니다. 우산을 들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 손에서 사라지듯, 손수건이 사라지듯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 장군이가 말한 저 먼 곳에서 다가오는 전재에 의해서 마동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힘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는개가 한 손에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들고 웃으며 마동이 앉아있는 벤치로 걸어왔다. 공백이 그녀 하나로 인해 가득 채워졌다.


 “찾는 사람이 없어서 와인 저장고에 넣어 두고 있었나 봐요. 가격이 조금 비싸니 이 와인과 좀 더 저렴한 와인을 한 병 더 구입해 가요.”


 두병씩이나 사다니. 와인은 마시면 취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변이 하는 세계와 이변의 사람들 3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