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4일째 저녁
324.
마동은 는개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와인 잔으로 옮겼다. 언제 부었는지 모를 붉은색의 와인은 병원에서 분홍 간호사가 줬던 주스의 색과 닮았다. 그러고 보니 주스의 색이 와인의 색이었다. 마동은 와인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 넘김이 부드러웠다.
“기억이 없어. 내 고등학교 시절 그 부분이 삽으로 파낸 듯 크고 검은 구멍이 그 자리에 있어.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도 희미한 기억만 있어. 공백이 내가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매우고 있어. 아마도 나는 점점 변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변이는 누구나 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의 변이가 아니야. 제대로 설명하기가 힘들어. 모래시계와 비슷해.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래시계가 아니라는 거야. 모래시계를 누군가 뒤집어 놓지. 그러면 모래가 아래로 떨어져. 알기 쉽게 한쪽에 색연필로 표시를 해두는 거야.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이 아래에 있지. 그리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으로 모래가 떨어져. 모래가 다 떨어지고 나면 모래시계는 움직이지 않아.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표시되어 있는 부분이 위로 올라가 있고 모래가 알아서 밑으로 떨어지고 있어.” 마동은 잠시 쉬었다. 설명이 적당한지 생각을 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의 변이는 기차에서 갑자기 비행기로 트랜스폼 하는 변화가 아니야.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처럼 인간에서 벌레로 변이 되는 것도 아니지. 그런 것과는 다르게 변이하고 있어. 는개가 말하는 변이는 대부분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또는 살아가기 위해서 변이 하는 것이지만 나는 죽음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변이 한다고 말할 수 있어. 는개는 이해하지 못해.”
“전 이해가 돼요.”
는개는 마동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머리는 물기를 아직 머금고 있었다. 마동의 티셔츠인 브이 네크라인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가슴골도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목은 잘 빚은 도자기의 입구처럼 가늘고 도도해 보였다.
“세미나의 담력시험에서 나는 어둠을 목격했어. 우리가 밤이 도래하면 흔히 보는 어둠이 아니었어. 그것은 암흑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질척거렸고 끈적이는 어둠이었어. 어둠에 손을 내밀면 어둠은 손을 짚어 삼켜 버리고 다시는 내주지 않을 어둠 말이야. 그런데 어둠 속에서 더 검은 어둠이 나오는 모습을 나는 봤어. 그때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꽤 무서운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평소에 무섭다고 느껴지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인데 말이야. 그런데도 어둠은 너무 무섭더군. 우리 조의 사람들은 결국 그 어둠에게 영혼을 내줬던 거야. 일단 영혼을 주고 나면 무섭다는 감정도 사라지게 되지. 그렇게 되면 삶이 훨씬 단순해질 수 있어. 내가 지금 멀쩡한 건 내 안에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또 다른 마음이 외부의 지배적인 어둠을 방어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이번에는 는개가 마동의 손을 잡았다. 번갈아가면서 마동과 는개는 서로 손을 잡았다.
“난 그 흉가에서 어둠이 내미는 빵을 먹지 않았거든. 그것 역시 언어로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어둠은 우리에게 빵을 내밀었지. 빵은 대단한 유혹이었어. 생존에 관한 유혹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는 대부분 굉장한 공복감을 지니고 있었거든. 그 공복감이라는 거대하고 깊고 무지막지한 허기로 가득 차 있어서 어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어.” 틈을 만들었다. 마동의 침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틈으로 빠져 들어갔다. 잠깐의 침묵 역시 틈새로 스며들어갔다. 마동은 지금 자신이 조리 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는개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말을 해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