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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an 03. 2021

과일에게 배신을 당하다

일상 에세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즘의 과일은 무슨 짓을 당했기에 맛이 너무 난다는 것이다. '너무'라는 부사가 지금처럼 긍정적으로 바뀌기 전의 의미로 '너무'다. 너무 높고, 너무 어둡고, 너무 커서 호러블 한 것처럼 과일에서 맛이 너무 난다.

품종개량에 대거 성공하여 재배한 모든 과일 광고의 제일 앞에 붙는 말이 당도가 최고라는 말이다. 보통 광고는 거품이 많은데 과일의 광고는 정말 거짓말하지 않고 광고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도가 높고 깊다. 어마 무시하게 달다는 말이다.

오래전에는 수박이며 귤이며 달달한 과일을 과일의 바닷속에서 찾아야 했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다. 그래도 귤 정도는 예전처럼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섞인, 차갑고 쎄그라운 귤은 놔둬도 괜찮지 않을까. 굳이 겨울에 미간을 좁히며 맛있게 먹었던 귤에게 까지 바늘과 호스를 꽂아서 온갖 실험을 하여 당도만 높은 슈퍼 귤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을 필요가 있을까.

아직 맛 표현이 덜 했던 어렸던 조카에게 귤을 먹였을 때 그 새콤함에 자연적으로 표출되는 얼굴 표정이 지금의 어린이들에게서는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귤이 슈퍼초사이어 귤이 되어서 전부 맛이 너무 나 버렸다. 단 맛이 처음에 강타하고 난 후 다음에 쎄그라운 맛이 따라와야 하지만 끝끝내 단맛 가득한 귤이 탄산수처럼 입 안에서 터지고 만다.

이럴 때 과일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기분이 든다. 올여름에, 아니 지난여름에 그렇게 좋아하는 포도도 사 먹지 않았다. 샤인 머스켓 때문인지 포도가 정말이지 꿀맛처럼 달디달았다. 어째서 모든 과일이 이렇게나 전부 맛이 너무 날 수 있을까. 키위, 자두, 체리, 복숭아까지 여름에 먹은 과일 모두가 이름만 다를 뿐 대체로 당도가 대단했다.

그래, 겨울을 기다리자. 겨울에는 사과도 있고, 무엇보다 쎄그라운 귤이 있으니, 라며 감염병이 도래한 세계에서 잘도 버텼다. 하지만 귤이란 귤이 이렇게도 모두가 하나같이 달아도 되는 것일까. 멀리서 보는 아파트처럼 개성이 말살되었다. 과일이 가지고 있던 어떤 아이덴티티가 몽땅 인간의 욕심에 의해 사라져 버리고 눈동자가 검게 되어서 갖은 괴물로 탄생되어 그린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아무튼 과일에게 배신당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제는 배를 먹었는데 참 시원했고 참 달았다. 이 정도로 달게 과일의 맛을 내려면 약품이라든가, 그걸 피해 갈 수는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과일을 구입하면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렇지만 귤 정도는 그대로 넣었다가 까먹곤 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그렇게 지금까지 지내왔고 여러 번의 겨울을 보냈다.

얼마 전에 임지호 요리사가 귤을 베이킹파우더로 닦아서 물에 씻어 귤을 까먹는 걸 보았다. 귤껍질에 농약이 묻어 있을 수 있으니 손으로 그대로 만지고 까서 먹으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귤을 까먹는 것에도 이렇게까지 복잡한 세계가 되었다. 그 누구도 귤을 씻어서 까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귤이란 검은 비니루 봉다리에 가득 담아서 사들고 와서 엎드려 만화책을 보면서 바로 쓱 꺼내서 까먹고, 티브이를 보면서 까먹고, 친구들끼리 모여 담요에 전부 발을 밀어 놓고 담요 위에 여러 개의 귤을 던져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귤을 까먹었다. 이제 이런 모든 것에 제동이 걸렸다. 귤에게, 과일에게 배신을 당하는 날들이 점점 오고 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곧 나올 신곡의 노래 중 가사에 이런 말이 있다. 

‘생각을 하지 말고 생활을 하자’
너무 생각에 생각에 의한 생각을 하다 보면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 나중에 나에게 그대로 그 힘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 의미를 두지 말고 시시콜콜해지자. 힘을 빼고 멍하게 있을 수 있으면 있자. 하루키의 말대로 물을 많이 마시고, 천천히 걷자. 그리고 오래 걷자. 그러다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요컨대 '여느 때와 다른 것'이라고, 여느 때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무엇인가가 생기는 것보다는, 여느 때는 무엇인가가 있는 곳에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요즘의 과일처럼 삶은 우리를 자주 배신하며 종종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생각을 하지 말고 생활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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