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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y 19. 2021

마른 김, 간장 그리고 된장국

일상 에세이

어린 시절 엄마가 시장에 갔다 올게, 몇 시까지 올 테니까 동생 잘 보고 있어.라고 하고 시장에 갔던 적이 있었다. 나도 초등학교 저 학년이었고 동생은 더 어렸다. 점심시간까지 온다던 엄마는 오지 않고 계속 시간이 흘렀다. 동생은 방에서 재미있게 인형을 들고 놀고 있었고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걱정이라는 게 어디에서 오는 건지 딱히 잘 모를 걱정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말 안 들으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느니, 엄마가 놔두고 시장 가서 안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 했다. 주로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엄마나 아버지가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들이었다. 한 번 밖에 놀러 가면 날이 저물어서야 들어오는 나에게 그런 말을 자주 했다. 그래서였던지 엄마가 벌써 와야 했지만 오지 않아서 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동생은 오빠, 배고파.라고 계속 말했다. 엄마는 아직 오지 않고 배고픈 동생 때문에 하릴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밥을 챙겨줘야겠지만 뭘 해 먹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반찬통을 보니 김이 있었고 간장종지에 양념간장을 붓고, 밥솥에서 밥을 퍼서 김에 밥을 싸서 간장에 찍어서 동생을 먹였다. 마른 김이라 입천장에 달라붙는데 동생은 또 그게 재미있어서 까르르 거리며 맛있다고 했다. 동생이 마른김에 싼 밥을 맛있게 먹을수록 나의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도착해야 하는 시간이 훨씬 지나 한 시간이 넘어갔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엄마는 말 안 듣는 내가 미워서 버리고 간 것일까.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내가 아닌 진짜 아들을 찾으러 간 것일까. 그런 생각에 불안이 깊어지니 울고 싶어 졌다. 곧장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동생이 옆에서 인형을 들고 김에 싼 밥을 다 먹고 또 달라고 했다. 눈물을 꾹 참고 마른 김에 밥을 말아서 간장에 찍어서 동생 밥상 앞에 몇 개를 놓았다. 동생은 하나를 집어 먹고 인형을 가지고 놀고, 또 하나를 집어 먹고 인형과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김이 목에 걸렸는지 동생이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나는 물을 떠서 동생을 먹였다. 마른 김에 밥을 먹을 때에는 늘 엄마가 된장국을 끓여줬는데 고작 김과 밥과 간장뿐인 밥상에서 동생이 맛있다고 먹고 있으니 불안을 누르고 서러움이 올라왔다. 아버지 회사에 전화를 해볼까, 엄마가 시장 가서 오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울면서 말하면 좀 나아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집을 둘러보니까 꼭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라 우리 집을 가장하고 있는 어떤 공연장 같은 세트처럼 느껴졌다. 잘못 와 있다.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다. 우리가 있을 곳에는 고작 마른 김에 밥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오빠, 더 만들어줘.라는 동생의 소리에 눈물이 콱 터질 것 같았다.


그때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배고팠구나, 라며 만두를 굽고 국을 만들어 동생을 먹였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자리라는 건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그 자리가 비록 찌질하고 누추하고 마른 김에 밥 밖에 없을지라도. 사실 그 뒤로 마른 김이 밥상에 올라오면 잘 먹지 않았다. 조미김보다 맛도 없었다. 무엇보다 목을 콱 막히게 하거나 입천장에 달라붙는 기분이 동생을 챙겨 먹이기 전과 후로 나누어졌다. 그러다가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고 아버지와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집으로 온 겨울의 어느 날 아버지가 마른 김에 밥을 싸서 간장에 찍어 나에게 먹였다. 씹고 있으면 아버지가 된장국을 한 숟가락 떠서 또 먹였다. 아아 참 맛있었다. 그 기억은 따뜻함으로 내내 남아있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영화 ‘괴물’에서 마지막 장면에 강두 역의 송강호가 죽은 현서 대신 아들로 들인 세주를 깨워서 밥을 먹일 때 김에 밥을 돌돌 말아서 먹는데 어릴 때 기억이 확 밀려왔다. 영화 속 그 장면의 계절도 겨울이었다. 매점 밖으로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 늦잠을 자고 있으면 아버지가 깨우고,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바로 먹던 마른 김, 뜨거운 밥, 간장, 된장국. 지금 이렇게 먹어도 그때의 맛은 날리 없어서 일부러 입천장에 마른 김을 붙여보고 한 번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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